2일 차의 여명도 오기 전에 일어났다.
잠자리를 바꾸어서 그런지 깊은 잠에 빠져들지는 못한 것 같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어제 보아 둔 아침밥을 하는 식당을 찾아간다. 선발대로 내가 나섰다. 식당이 열려있는지 확인을 하고 전화하기로 한 것이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기보다는 탐색을 한 것이다. 25시 해장국집이다. 하지만, 해장국이 아니 백반이 아침이다. 어르신 두 분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 대부분도 비슷하다. 강진의 아침은 일찍 시작하는 것 같다.
아침을 해결하고 숙소에서 짐을 챙기고 두륜산으로 이동을 한다. 처음에 강진의 숙소를 잡은 것은 덕룡산을 오르고 난 다음 두륜산으로 가기 위하였지만, 내려오면서 일정이 바뀌어 덕룡산은 주마관상을 하였다. 도로에서 덕룡산과 주작산을 보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두륜산으로 자동차를 달린다.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하지만, 이른 시간에 다산초당을 보고 백련사를 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두륜산을 먼저 가는 것이다.
두륜산 입구 대흥사로 들어간다. 먼지 초입이다. 가을날이지만 남쪽이라 아직, 단풍이 없어서 그렇지 단풍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을 것 같다. H는 아내와 함께 단풍시즌에 왔을 때 멋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경험을 기초로 위로위로 이야기한다. 매표소 근처에 자동차를 주차시키면 2km 이상을 걸어야 한다고 하였다. 아침이라 아직 주차장도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마지막 주차장까지 가자고 한다. 의견에 따라 마지막 주차장까지 이동한다. 길이 좋다. 도착하였다.
이제 길을 선택하여야 한다. 우리는 오도재를 거쳐서 두륜산을 돌기로 하였기에 주차장 인근에 있는 산문을 피하여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계방향으로 걷기로 한 것이다. 등산로를 찾아 이동을 하는데 바로 앞에 또 주차장이 있다. 그 주차장에 내린 등산객들이 우리들에게 물어본다. 6명의 여성분들이 4명의 남성에게 묻는다. 하지만, 피차일반이었다. 등산로 초입을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전자지도를 보면서 이동을 한다.
우리가 이동을 하는데 대흥사 대웅보전이 있다고 한다. 대흥사 대웅보전이 바로 앞이다. 그곳은 내려오면서 돌아보기로 하였는데 바로 나타난 것이다. 사찰의 전각들의 현판을 누가 썼는지 찾아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J가 전각의 현판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대웅보전의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원사가 썼으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 갈 때 이곳에 들려서 편액을 써서 이곳에 걸었다가 귀양에 풀려났을 때 그것을 떼고 이광사의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이웃한 전각에 있는 편액은 추사 쓴 그것이 그대로 있었다. 이것을 보면 느낀 것은 이것이다. 조선시대까지 해남에서 제주로 가는 뱃길이 있었고 유배를 가는 유력인사들이 이곳에 있는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대흥사에 있는 스님들하고도 교류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들이 제주로 유배갈 때 대흥사에서 잘 대해주었고 그들의 재능을 대흥사에 기부한 것이 편액으로 남아 있었다.
대흥사를 소개하는 홈페이지 보면 "호국도량 차(茶)문화의 성지"이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며,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대흥사는 유네스코에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한국의 산지승원을 구성하는 7개 사찰인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는 종합적인 불교 승원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또한 산지에 입지함으로써 곡저형, 경사형, 계류형의 3가지 형태로 유형화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불교 승원이다. 대흥사는 지금 다시 확장되고 있다. 기존의 전각들은 잘 보전되었으면 한다.
이제는 산으로 가야 하는데 석탑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 석탑옆에 있는 철쭉이 계절을 잊은 듯 꽃을 피우고 있다. 11월에 철쭉이 피어 있다. 남도에는 철쭉과 진달래가 심심하게 계절을 잊은 듯이 핀 것을 수시로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산으로 가는데 등산로를 찾았다. 등산로 초입에 조금 전 보았던 6명의 여성들이 앞서간다. 우리는 천천히 따라간다. 하지만 갈림길에서 우리는 북미륵암으로 가는 데 이분들은 임도의 포장된 도로를 따라간다. B가 그리로 가면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들은 그대로 간다. 나중에 물어보니 못 들었다고 한다.
이제 갈림길에서 북미륵암으로 오른다. 힘들며 힘들다고 할 것이다. 네이버 지도의 봉우리 이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곳에서 알았다. 도립공원을 안내하는 지도에 오심재의 오른쪽에 있는 노승봉이 네이버 지도상에는 오심재의 왼쪽인 고계봉 아래에 있다. 우리가 노승봉을 거쳐야 하는데 하면서 고민하였던 이유가 이 네이버 지도를 보고 고민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도립공원 안내도를 보고 안심을 하였다. 이제 갈림길에서 북미륵암을 거쳐 오심재로 간 후 노승봉을 오르고 가련봉으로 가면 된다.
북미륵암까지 오르는 길은 너무 좋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스님들이 수시로 오르고 내리니 등산로가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륜산은 대흥사를 중심으로 북미룩암, 진불암, 남미륵암, 일지암 등의 다양한 암자가 위치에 있다. 오늘은 그 암자 중에 북미륵암, 진불암, 일지암 등을 돌아볼 것이다. 등산만 하면 4시간 30분이면 충분하지만 문화재 탐방과 종교순례를 같이 하니 5시간 이상은 소요될 것이다.
재미있는 바위를 담아본다. 사실 오르고 나면 전체가 재미있는 바위인데 오르면서 가쁜 숨도 들이키고 주변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찾기 위하여 이것저것에 관심을 갖는다. 두륜사에서 단풍을 보고 같이 담는다.
북미륵암에 도착하였다.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삼층석탑이 동쪽과 서쪽에 있다.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용화전이 닫혀있지만, 불교신자이면서 법명이 있는 B와 H가 전을 열고 들어간다. 그전에서 삼배를 한다. 마애여래 좌상은 고려 전기 불상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암자의 위쪽 자연 암벽을 최대한 활용하여 마애여래좌상[암벽 높이 8m, 좌상 높이 4.2m]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본존불의 육계(肉髻)가 뚜렷하며 이마 경계선 주변에 나발이 표현되었다고 한다.
삼층석탑이 동쪽과 서쪽에 있다. 서쪽의 석탑은 용화전 왼쪽에 위치하고 있고 동탑은 약간 위쪽으로 올라가야 볼 수 있다. 마애여래좌상과 같이 11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 강진만이 보이고 그 경치를 바로 볼 수 있다. 요사체 뒤에 있는 바위가 재미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담아보았다.
요사체에 스님들이 기거하면서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건물을 직접적으로 오지 않고 CCTV등으로 확인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닫혀 있는 전에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삼배를 하고 있으니 올라올 것인지 고민을 하는 모습이 요사체 창문너머로 보이고 있었다. 국보로 관리되고 있는 마애여래좌상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하고 추측을 하였다.
문화재 탐방과 종교순례를 일단락하고 오심재로 이동을 한다. 고계봉과 노승봉 사이에 위치한 중요한 고갯마루였다는 안내가 되어 있다. 오소재 약수터에서 대응사로 넘어가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고개이며 조선말 이곳의 아암혜장선사가 다산초당에 머물렀던 다산선생과 교류하기 위하여 넘나들었던 고개로도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오심재는 지금도 안내산안회 등이 오소재에서 출발하여 이곳으로 오고 있는데 우리는 천천히 대흥사에서 올라온 것이다. 고계봉을 쳐다보고 노승봉을 방향을 잡으면서 올라가면 된다.
두륜산에는 케이블카가 있다. 고계봉 9부 능선까지 쉽게 올라올 수 있다. 그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등산객들이 쉽게 가련봉을 갈 수 있다. 고계봉을 내려와 오심재로 온 후 노승봉을 지나 가련봉을 오르면 된다. 고계봉 정상이 머리를 들고 있지만 우리는 고계봉이 아닌 노승봉을 오른다. 그리고 중간쯤 흔들바위에서 흔들어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흔들릴 것 같은 바위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나는 부석과도 같다고 본다. 노승봉을 오르면서 저것을 어떻게 오를까 고민하면 등산로가 보인다. 갈지자로 이어지면서 암릉 사이에 난 길을 들어서고 데크로 이어지는 깎아지른 길을 오른 것이다. 노승이라고 보기보다는 젊디 젊은 승려의 모습이다.
노승봉에 올라서 강진만을 바라다보는데 익숙한 방조제가 보인다. 나와 H가 8년 전 삼남길을 걸을 때 햇빛이 쨍쨍한 직선으로 된 방조제를 걸으면서 그렇게 지루하였던 길이 보인다. 이곳에서 보니 얼마되지 않는데 2km 거리가 이렇게 짧게 보인다. 바다를 막아 방조제를 만들고 이제 물을 빼내어 간척지로 만들어야 하나 그럴 필요성이 없어 저수지로 사용되고 있다.
기온이 급강하하여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올라올 때 벗어놓은 재킷을 입고 서서히 오른다. 옛날에는 쇠줄을 잡고 바위를 기어올라 구멍바위를 지나가야 했지만, 이제는 데크를 이용하여 편안하게 지나갈 수 있다. 이제는 두륜산 통천문(通天門)을 가고 싶은 사람만 지나갈 수 있다. 편안하게 등산하고 싶은 사람은 데크를 이용한다. 노승봉 정상에 도착하여 가련봉을 보고 다음에 가보지 못한 고계봉을 담는다. 노승봉을 지나고 가련봉을 가면서 데크 위에 서서 가련봉의 멋진 암릉의 모습을 담아본다. 작은 병풍처럼 우뚝 선 바위가 멋진 자태를 나만 보는 것이 아쉬워 여기에 같이 담는다. 암릉지대를 오르고 내리면서 데크의 고마움을 그대로 느낀다.
가련봉에 올랐다. 부처 이름 가迦에 연꽃 련蓮자를 합쳤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부처와 연꽃을 나타내는 봉우리’란 뜻이다. 불가에서는 연꽃을 부처의 손바닥에 비유한다. 만일재로 내려간다. 만일재로 내려가면서 비둘기 바위가 있다. 누구는 잉꼬라고 하기도 한다. 내려가는 길에서 아침에 만난 6명의 여성분들을 만난다. 우리들이 천천히 오르면서 문화탐방, 종교순례를 하면서 노승봉도 오르고 하였는데 여성분들은 바로 가련봉을 오르는 것인데 힘들었다고 한다. 이유는 임도를 따라 오르면서 빙빙 돌아서 그런 것 같다. 사실 편안한 길은 임도이지만, 임도는 자동차가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오르막을 바로 오르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가 산행을 할 때 임도를 따라 걸으며너 편안하다고 느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2배나 더 걸었던 기억이 있다.
만일재에 도착하였다. 뒤를 돌아보니 가련봉의 암봉이 그대로다. 만일재 주변에 억새가 있다. 남도 지역에 유명한 억새지대라고 한다. 천관산, 무등산, 월출산의 억새와 같이 두륜산의 억새도 유명하다고 한다. 사실 천관산 억새나, 무등산 억새가 이곳보다 더 좋다. 만일재는 천동과 천녀가 해를 매달아 두었던 천년수가 있는 만일암 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에 있는 만일재다. 어쩌면 양 봉우리의 호위를 받으면서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서 두륜봉을 갈 수도 있고 대흥사로 내려갈 수도 있다. 우리는 노승봉, 가련봉, 두륜봉을 오른 후 하산하기로 한 만큼 오른다.
두륜봉을 바로 오를 수 있는 길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길은 뒤로 암릉지대를 돌아 돌아 오른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데크가 있고 그곳에 구름다리가 있다. 구름다리가 두 바위가 만들어 놓은 구름다리다. 구름다리 오른쪽으로 올라서 구름다리 위에 서 본다. 그리고 두륜봉으로 간다. 둔군봉 정상에서 다시 가련봉을 본다. 지나온 암봉인 노승봉, 가련봉을 함께 본다. 절경이다.
이제는 하산이다. 진불암까지 내려가서 다시 일자암으로 갈 것이다. 친구가 일지암을 꼭 가야 한다고 하였기에 그곳을 갈 수밖에 없다. 그곳은 차와 관련된 다양한 무엇이 있다고 하였다. 진불암에서 바로 내려가도 되지만 그렇지 않고 일지암으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진불암에서 다시 북미륵암으로 가는 길을 들어선 것이다. 오르막이 시작되고 얼마 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타나고 하산로가 나타난다. 임도를 따라 하산을 한다. 일지암이라는 이정표를 만나서 100m를 가는데 400m를 걸어간 것 같다. 직선으로 100m를 도로는 굽이굽이 움직이니 곱하기 3이 된 것이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차를 연구하고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 등 다서를 저술하고 다도를 정립시켰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도 교분하였다고 한다. 일지암에 도착하니 선사가 머물 때와 같은 초가가 아직도 있다.
그리고 그곳의 개 한 마리가 그곳을 지키면서 우리를 반겨준다. 등산객과 순례객들이 주는 다양한 먹이에 익숙하여서 그런지 배낭을 내린 나 주변에 순식간에 온다. 개의 품종이 궁금하여 스마트폰의 AI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결과를 바로 알려준다. 문명의 이기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일지암을 지나 이제 표충사로 간다. 표충사는 사찰이 아니고 사당이다. 왜란 등에 승병으로 참여한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1788년(정조 12) 대둔사 7세 법손(法孫)인 천묵(天默)이 세 분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자 조정에 상소하자, 정조는 세 승려의 충정을 크게 치하하며 친히 표충사라 사액하였고, 이듬해 사우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형식의 사당이다.
이웃한 곳에 스님의 동상이 있어 이 세분 중에 하나인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초의선사였다.
대흥사 전체를 보면서 산을 조망하는 곳에서 두륜산을 보았다. 월간산에 보면 두륜산의 모습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은 주먹 쥔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쥔 모습이라고 한다. 이를 두륜산에 대입해 보면 가장 오른쪽의 두륜봉頭輪峰(629.3m)이 부처의 머리이고, 가련봉迦蓮峰(703m)은 오른손, 노승봉(688m)은 검지를 든 왼손이다. 그리고 더 왼쪽의 고계봉高髻峰(638m)은 발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출처 : 월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