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Oct 05. 2021

대안학교 선생님은 절대 못 해

대안학교 선생님은 절대 못 해_5.20


        

한 번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대안학교를 다녔다. 원래 초등과정밖에 없었던 학교였는데 내가 5학년이었을 때 쯤 중학교가 생겼다. 그 학교는 기숙사학교였기 때문에 9년동안 한 곳에서 살았다. 기숙사아니면 집이었다. 우리나라는 넓고 지구는 더 넓지만 내 세계는 학교가 전부였다. 그 학교에 다니면서 절대 선생님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루종일 가까이서 지켜본 선생님들의 모습은 되고 싶을 만큼 좋아 보이지 않았다. 솔직하게, 너무 힘들어 보였다.

나는 빈말로도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 말을 잘 듣지도 않았다. 나는 선생님들의 속을 여러번 끓였다. 내가 아주 좋아했던 선생님이 있었다. 과학과 수학을 가르치셨던 것 같다. 버릇없고 나밖에 모르던 내게 참을성 있게 인간관계를 가르쳐주셨다. 나는 고집이 셌다. 친구들과 자주 갈등을 빚었고 자주 혼자가 되었다. 선생님이 어느 날 내게 교환 일기장을 주셨다. 함께 쓰자고 하셨다. 표지에 리락쿠마가 그려져 있고 누르면 푹신하게 들어가는 충전재가 들어가서 몹시 귀여운 일기장이었다. 나는 몹시 기뻤다. 다른 어떤 아이들도 받지 못한, 내게만 주신 일기장이었다. 우리만의 비밀이었다. (물론 나는 참지 못하고 비밀일기장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내가 그 일기장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결혼하셨다. 예식장에서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천천히 걷는 선생님은 반짝반짝 빛났다. 들뜬 마음이 주체가 안 돼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박수를 쳤다. 결혼하는 당사자들보다 더 흥분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방정을 떨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결혼 후 학교를 떠나실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열심히 박수 칠 수 있었다. 교환일기는 몇 번 교환되지 못 하고 내 방 책장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다. 몇 년이 지나고 그 일기장을 다시 펼쳐봤다. 마구 날려쓴 내 세줄짜리 일기 옆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정성껏 써 주신 선생님의 일기가 있었다. 그 일기에는 몇 년 뒤에 다시 읽었을 때 더 울컥하게 만드는 다정함이 있었다.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고 나는 한 살을 더 먹었고, 새로운 선생님이 왔다. 새로 온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셨다. 나는 과목 중에 국어를 가장 만만하게 여겨서 국어 수업 시간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 선생님의 수업에서는 돌변했다. 나는 수업에 협조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눠주신 프린트물에 펜 끄트머리에 달린 작은 불빛을 비추어야 글씨가 보이는 매직 시크릿 펜으로 답을 적었다. 적은 것을 읽어보래도 고집스럽게 반응하지 않다가 선생님이 거의 애원하다시피 부탁해야 내가 쓴 것을 읽곤 했다. 그 선생님이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 같았다. 전혀 상관없는 억지였고 사실은 속으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미워하고 싶고 괴롭히고 싶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척했다. 내가 괴롭히던 선생님은 우리 학년의 담임선생님이 되었다.

전교생이 30명 안팎을 왔다 갔다 하는 작은 학교였기 때문에, 한 학년에 학생이 많아도 일고여덟 명 정도였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선생님을 괴롭혔다. 의도하기도 의도하지 않기도 했다. 우리는 자주 싸웠다. 먹을 때도 잘 때도 씻을 때도 보는 얼굴들이어서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치고받는 애들을 뜯어말리느라, 삐지고 우는 애들을 달래느라 바빴다. 선생님이 스트레스로 탈모가 생겨서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았을때 우리는 그것도 놀려댔다.

담임선생님만 힘든 게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수업마다 꼭 한 번씩은 말을 너무 안 들어서 선생님이 화를 내게 만들었다. 대놓고 딴짓을 하거나 선생님 말을 끊고 딴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게 재밌었다. 선생님들은 자주 화를 냈고 가끔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의 눈물을 목격한 친구가 선생님이 우리 때문에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면 조금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님 말고도 고민거리가 많던 나는 깊이 있는 반성까지 하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목격하지 못했던 눈물이 훨씬 많았을 게 분명하다.

학교에는 늘 새로운 친구들이 전학을 왔다. 그만큼 많은 친구들이 전학을 갔다. 졸업생보다 왔다 갔다 하는 전학생이 훨씬 많았다. 학생만큼 선생님도 자주 바뀌었다. 한 과목만 가르치는 시간제 선생님은 더 자주 바뀌었다. 대안학교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은 선생님도 있었다. 어느 선생님은 학생을 팼다. 어느 선생님은 요즘 임신한 여자들의 영악함과 낙태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설명했다. 학생들이 바로 뒤에 타고 있는 차에서 동료 선생 뒷담을 하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모든 것은 공유되었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모르는게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수업을 망칠 만큼 말을 안 듣는 일은 사라졌다. 무언가 깨달은 게 있어서인지 미래가 불안해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인지 혹은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이 많았고, 힘든 일은 계속 생겼다.

어떤 아침에는 큰일이 있었다. 그맘때 갈등을 심하게 겪던 반의 담임을 맡고 있던 선생님이 출근길에 쓰러졌다. 그전날 밤에 학생들의 모부님들을 학교까지 불러모아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는데, 내가 자러 들어갈때까지도 어른들이 모인 강당에 불이 환했다. 과로와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진게 분명했다.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일이며 학교의 교사복지 방식이 이대로 괜찮은지 재고 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중학생이었던 우리들은 그 선생님이 불쌍하다는 생각 이상으로 사고가 뻗어나가지 않았다. 너무 작은 학교였고, 그래서 더 선생님들의 부담이 큰 학교였다.

그 선생님의 반은 아니었고 평소에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아서 나는 선생님이 쓰러질만한 부담을 주었던 학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무거운 책임에서 발을 빼고 싶었다. 그래서 그 반 애들을 친구들과 더 욕했던 것 같다. 다 쟤네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싶었다.

학교는 무엇으로 굴러갈까. 학생과 교사의 소통, 교사 역량, 잘 짜인 교육과정? 그게 뭐든 그 작은 학교에는 다 부족했다. 한 언니는 이런 작은 대안학교에서 줄 수 있는 월급이 몹시 적으며 선생님들이 거의 봉사하는 거나 마찬가지랬다. 그래서 감사해야 한다고. 그래서 선생님들이 그토록 자주 학교를 떠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가장 초기에 학교를 함께 만들었던 선생님들까지 이런저런 사정과 문제들로 학교를 나가면서 어느순간 학교에 나보다 오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교장 선생님까지 떠나서 우리 담임을 하고있던 그 선생님이 교장직을 맡게 됐다. 학교 사람들 중 선생님 한 명을 빼고는 다 나보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선생님들은 계속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3학년들을 위한 수업이 생겼다. 인문, 사회, 실용 정도의 분야로 나누어서 각자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웠는데 우리 학년의 거의 모두가 인문을 택했다. 그동안 많은 친구들이 거쳐 간 우리 학년은 마지막 학년이 되자 5명만 남아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괴롭혔던 선생님을 점점 좋아하게 됐다. 학교에 왔다 간 수많은 선생님 중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생님을, 우리가 괴롭히고 속을 끓여도 도망가지 않고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싫어할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아닌 척 하기도 했지만 다들 선생님을 좋아했다.

나는 일주일 내내 인문수업만 기다렸다. 수업은 학교 본 건물과 조금 떨어진 아주 작은 건물에서 했다. 큰 창이 나 있어서 바로 뒤의 산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을 수 있었다. 아늑한 공간에서 여러 해를 함께 보내 익숙해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는 지혜, 평화, 자유, 정상과 비정상, 생각과 마음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썼다. 처음으로 말로만 쓰던 단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깊게 생각해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흥미로웠다. 점자도서관에 탐방가서 봉사를 하기도 했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지 않나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수업은 나의 세계관을 뒤흔들어놓았다. 수업 초반에는 함께하는 수업을 하고 후반에는 각자 관심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공부했다. 뭘 공부할지 고민하는 내게 선생님은 페미니즘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내 귀로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듣자마자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조금 꺼려하는 내게 선생님은 한 번 해보자고 말했다. 그때 선생님이 내게 페미니즘을 공부해보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수업에서 읽은 책들과 나눈 대화들을 시작으로 나는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생겼다고 느꼈다. 새로운 눈으로 본 세상과 사람들은, 나 자신조차도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계속 페미니즘을 파고들었다. 이마에 하나 더 생긴 눈은 곧 원래 있던 눈으로 흡수되었다. 다시 페미니즘을 알기 전처럼 생각할 수도, 전처럼 세상을 볼 수도 없었다. 졸업 발표주제도 페미니즘으로 정했다. 봉사를 하러 가던 대학교에서 점자도서관에 대한 발표와 내 발표를 위한 설문을 돌렸다.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설문을 부탁하는 일이 처음에는 너무 어려웠다. 우리는 처음 몇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못 하고 길가에서 쭈뼛댔지만, 선생님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말을 걸었다. 결국 우리도 했다. 무섭게 노려보며 거절하는 사람에게 상처도 받고, 중학생이라는 말에 친절하게 설문을 적어준 사람에게 고마움도 느꼈다. 전단지 돌리는 사람들을 매몰차게 무시하지 못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졸업발표회 날, 어렵게 모은 자료로 만든 피피티를 띄우고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사람들 앞에 섰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설명하고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내 짧은 발표가 이곳에서 내 말을 듣고 있는 학생들, 졸업생들, 모부님들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단 오초라도 생각을 다시 해보게 만들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발표는 끝났고 머지않아 졸업이었다.

졸업식을 며칠 남겨두지 않았을 때부터 선생님에게 한자를 배웠다. 그때 한창 일본어를 독학하고 있었는데 너무 재밌었다. 일본어를 좀 더 익히려면 한자를 외워야했다. 선생님이 제안해주셨는지 내가 부탁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한자를 공부하기로 했다. 수업이라고 해 봤자 매일 저녁 20분 정도 한자를 쓰는 것이었다. 졸업식 바로 전날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선생님에게 수업을 하자고 했다. 선생님은 졸업식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수업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하루밖에 안 남았으니까 해야 하지 않냐고 답했다. 내일이 졸업이라는 게 믿기지도 않고 몹시 불안해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

선생님은 너는 어떻게 네가 되었니, 하고 농담 같은 말을 했다. 처음 선생님과 만났던 순간부터 그때까지의 기억들이 차르르 스쳐 지나갔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몹시 쑥스러우면서 기뻤다. 그 한마디로 나는 인정받은 것 같았다. 내가 정말로 성장한 것 같았다. 내가 선생님을 마구 괴롭혔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너무 죄송하면서도 감사했다. 9년 동안 내가 흘렸던 눈물과 웃음이 스며든 학교에서, 그 좁고 복잡한 세계에서 9년을 버티고 받은 진짜 졸업장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학년의 졸업과 함께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난 뒤 귀농해서 농사를 지으신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졸업하고 선생님에게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학교에 대해 전부 잊어버리고 싶었다. 한 번도 다시 학교를 찾아가지 않았다. 친구 몇 명을 빼고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요즘 그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아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잊고있던 기억이 잔뜩 떠올랐다.

나는 선생님을 꿈꿔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힘겹게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몹시 고되어 보였다. 그럼에도 선생님이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두 떠나버리는 학교에 남아서 선생님을 괴롭히는 우리들을 붙잡고 수업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감사를 전하고싶다.

작가의 이전글 내 옆집에 난민이 산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