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변하지 않지만 자라면서 그것을 숨기는 법을 배우고 성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 그게 완전히 본성을 버리고 새로운 어떤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는 그러한 본성이 [예민함]이었던 것 같다.
날 때부터 예민해서 늘 엉엉 울고 소리 지르고, 유독 엄마를 힘들게 했던 그런 아이. 삼남매 중 장녀.
그 아이는 여전히 어딘가 예민하고 날이 선 사람으로 자랐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어디까지 솔직해져도 되는가-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우울함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바깥에 내놓는 게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건 아닌가,
이런 이야기들이 약점이 되어 누군가는 나를 물어뜯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의 나는 그때보다 단단해졌고, 소중한 것들이 생겼고, 덕분에 하고 싶은 작업들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 확산이 지속되면서 몸담고 있는 공연예술계 회사도 나의 작업도 침체기를 겪고 마음이 부쩍 늘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우울증이 심하던 당시 나의 감정과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썼던 기억들이 부쩍 흐려지는 것 같아서 그때의 일기를 차분히 정리해봤다.
이때의 내가 있어서 지금 나의 작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글은 흐림의 기록이다.
손에 쥐면 빠져나가는 모래알같은 기억들이지만 한 움큼이라도 더 쥐어보려고 가끔 글을 쓰곤 한다.
이때의 나도 나고, 극복한 지금의 나도 나다. 그 사실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릴 때 성격이 어둡진 않았다. 오히려 나이에 비해 순진하고 밝단 얘기를 더 많이 들은 것 같다.
(나쁘게 말하면 머리가 꽃밭)
늘 잘 웃는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었고 중학생 때까지는 소위 그룹 내에서 '나대는' 성격의 활달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수다도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영화 <조커>, <기생충> 등이 그러하듯 어떤 극적인 사건은 사실 절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복잡한 이해관계와 감정선이 하나둘씩 쌓이고 엉기다 보면 결국 보기에는 한 번에 무너지듯 보일 뿐이다. 이미 그전부터 계속 부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바깥에 엄마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참 망설여지는 일이다. 하지만 청소년기 이야기를 꺼낼 때, 엄마와의 일을 꺼내지 않으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없을 정도로 엄마는 나에게 비중이 크다.
10살에 갑자기 엄마는 이제 아빠와는 살지 않는다고 나를 불러 말했다.
"어차피 아빠는 주말밖에 집에 안 왔으니까, 별로 달라지는 건 없어. 괜찮지?"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이 날 이후로 정말 아빠와는 연락도 만남도 한 번도 없이 25살이 되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엄마도 젊은 나이에 혼자서 아이 세 명 몫의 (우리는 하필 삼 남매였다)
삶을 책임져야 했고, 여력이 없었고, 그만큼 예민해지고 화가 자주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엔 나는 철이 없었고 어렸다.
엄마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다정했으면, 예뻐해 줬으면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나 나나 말을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타입이고, 칭찬에 인색했다.
(그리고 나는 애정결핍의 왕이었다..)
고집도 세고 둘 다 안 지려고 해서, 늘 대화를 하면 별 것 아닌 거로 끝까지 싸웠다.
그렇게 호되게 사춘기가 찾아왔고, 감정의 골은 깊어지기만 했다. 삼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에 비해 엄하게 대해지고, 더 잘해도 평가절하된다는 느낌을 계속 받아서 그게 늘 불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엄마가 칭찬에 인색한 것이 아니었는지)
나도 이번 생이 처음이었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우린 미숙했다.
그러던 중, 중학생 때부터는 웹툰 작가의 꿈을 키웠다. 늘 미술은 좋아했었다.
당연히 미술학원 다닐 형편은 아니었기에 혼자 그림을 그리고, 공부는 중간 정도만 하고 애니고 입시 준비를 했었다. 결과는 후보 2등이었고 추가합격에 실패했다.
그렇게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그때도 계속 그림은 그렸고,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입시하는 아이들과 계속 마주하면서 듣는 "너는 왜 학원 안 다녀? 학원에서 입시 준비 안 하면 미대에 절대 못 갈 텐데"라는 질문을 듣는 것 자체도, 대답하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가 컸다.
돈이 없어서 안 다닌다고 해도 이해받지 못했다.
아마 어느 정도 상황인지 전혀 겪어보지 못했으니 그랬을 것이다.
'나도 다닐 수만 있다면 눈치 안 보고 다니고 싶어. 배우고 싶어.'
이렇게 자격지심과 열등감만 쌓여가고,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쳤다. 아무래도 고등학생 때가 자격지심의 정점을 찍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대입까지 실패하고 완전히 고립되었다.
입시가 전부인 줄 알았던 고등학생 때인데, 입시도 실패하고 이런 상황에 갑자기 청소년 신분에서 20살이 된다는 불안감이 너무 컸다. 그래서 재수를 하겠다는 핑계로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와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고, 아예 내가 다락방에 올라가서 지내며 마주치지도 않고
대화도 단절된 채로, 우리 집에 있어도 우리 집이 아닌 것처럼 지냈다.
돌아보면 분명 어릴 땐 밝은 성격이었는데, 한없이 부정적이고 염세적이고 사람을 싫어하는 성격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까지 된 걸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니까, 그림도 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알고 있다.
모든 순간에 그 순간과 온전히 같았던 나는 존재하지 않고,
고등학생 때 그림을 그렸던 감정으로 똑같이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21살, 타블렛 펜이 아닌 카메라를 들었다.
그렇게 흐지부지했던 재수가 끝나던 날, 갑자기 옛날 디지털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은 정말 충동적으로 찍고 싶어서 찍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홧김에 일을 저지르는 건 예삿일이지만.
맨 처음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 (2016)
직접 만든 보석함에 어릴 적부터 조개껍데기와 구슬 등을 버리지 않고 모아 두고 있었는데, 그걸 찍어봤다.
오랜만에 두근거렸다. 현실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이 아닌 것. 왜곡. 환상. 나에겐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캐논 600d를 얻어 그 후로 계속 독학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이 때도 사진을 찍을 때, 그림을 그렸던 때와 비슷한 사고 과정을 거쳐서 구성했다.
포토샵도 고등학생 때부터 독학을 해왔기 때문에, 사진을 찍고 보정을 해서 원하는 색감을 만들었다.
그렇게 작업한 사진들을 우연히 페이스북 미술그룹에 올려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봐주셨고 팔로워란 것도 생겼다. 집에서는 미술로 인정받아본 적이 없는데,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좋다고 해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나의 결핍을 SNS로 채우려고 할수록, 웹툰 <여중생 A>처럼 그곳을 낙원 삼으려 할수록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2017년도에는 1년 동안 아예 작업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창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10년만 버텨보자고 친구와 약속했다
계속 우울증이 심해지던 21살, 중학생 때부터 친했던 친구도 나와 상태가 비슷했다.
참다 참다 어느 날, 딱 10년만 더 버티고 (이때는 아마 존버라고 했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게 이 모양이면 그때 같이 죽자고 약속을 했다.
뭐 이런 약속이 있냐 싶지만은 오히려 나와 비슷한 동지가 있다는 사실과
지금 이거 도전해서 망해도 어차피 난 서른한 살에 죽을 건데 어때?라는 용기로 정말 버틸 힘이 생겼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뭐라도 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 그건 정말 중요한 힘이다.
사실은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다 포기한 듯, 내던지듯 하는 말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버티려면 돈이 필요하다.
난 이젠 가난이라면 진저리가 나고, 돈이 없어서 아쉬운 소리 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러던 중 투 X 플XXX 라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첫 번째 점포에서 1년, 두 번째 점포에서 3년 한 브랜드에서만 4년을 알바를 했다.
다행히 인내심은 좋은 성격인 데다가, 커피와 디저트를 좋아해서 적성에 맞는 편이었다.
(오직 사람만이 날 힘들게 했다.)
우울증으로부터 버티기 위해 아르바이트하기, 일기 쓰기 딱 두 가지를 했다.
어릴 땐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는 내가 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있었던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냥 나란 게 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 취향이고, 나라고 믿었던 것들도 한 번씩 의심해보기도 했다.
그 지점들을 짚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일기를 매일 썼다.
늘 창작에 매진했었는데, 오히려 22살에는 알바와 일기 쓰기에만 집중을 하고,
1년 동안 아예 작업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늘 지쳐있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공유할 마음의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창작활동이 도저히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힘들 때는 아예 상관없는 일을 하고,
창작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그때 당시에는 이러다 영영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컸다.
하지만 언제가 되었건, 다시 무언갈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날 찾아오지 않았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시간이 걸릴 뿐.
이렇게 23살까지 알바를 하고, 일기를 쓰며 정말 버티면서 보냈다.
알바로 돈을 모아 오롯하게 내 돈으로 처음 장만한 카메라.
canon 5d mark 3
스물셋, 오랜 공백을 딛고 드디어 무언가 만들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
창작자의 우울증 극복기 2 에서 계속-
창작자의 우울증 극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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