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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한 Oct 02. 2021

부들부들 고양이

그 순간 탱이는 내게 한 번 더 왔다.

함께 베개를 베고 쌔근쌔근 자는 탱이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나는 탱이의 어릴 적 얼굴을 모른다. 몇 년 전 겨울 탱이는 평택의 원룸가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탱이를 발견한 사람이 고양이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한 달 전부터 보이던 유기묘가 임신한 것 같아요." 글을 보고 급히 댓글을 달았다. “제가 내일 데려갈 테니 하루만 집에서 보호해주시면 안 될까요?” 버려져 길에서 임신한 고양이가 새끼들과 함께 겨울을 나기는 어려울 테다.


다음날 탱이가 있는 평택의 빌라에 갔다. 그 집에도 이미 고양이가 있었기에 탱이는 세탁실에 격리되어 있었다. 자신을 구하러 온 사람을 반겨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과는 달리 겁을 잔뜩 먹은 탱이는 세탁기 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다란 작대기를 휘적대어 꺼내보려 했지만 작대기에 치이면서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궁지에 몰린 고양이에게 매질을 하는 형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러려던 건 아닌데. 너무 미안해 작대기를 내려놓고 앉아 “아가야-” 불렀다. 갑자기, 틈새로 스윽, 까만 고양이가 나왔다. 탱이는 그렇게 내게 처음 왔다.


우리 집에서의 첫 저녁, 탱이는 기분이 좋은지 배를 벌렁 보이며 드러누웠다. 탱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편하게 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저게 뭐지? 배 아래에 ‘땅콩’이 보였다(혹시 모르는 분을 위해, 고양이 수컷 생식기를 땅콩이라고 귀엽게 부른다). 땅콩의 사이즈로 보아하니 중성화까지 된 모양이었다. 아니, 임신했다며? 배가 남산만 한데? … 그랬다. 탱이는 그저 살찐 고양이였던 것이다. 잠깐의 충격을 뒤로하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겠거니 둘째로 들이기로 했다.


오해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이해해갔다. 탱이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장난감을 흔들면 도망갔고 간식을 줘도 냄새를 맡기만 하다 돌아섰다. 가장 안쓰러웠던 때는, 내 옆에서 자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쓰다듬어주면 깊이 잠들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 때였다. 손길이 익숙지 않은가. 전에 탱이와 함께 살던 사람이 괴롭힌 건 아니겠지. 길 생활이 무섭고 힘들었을 거야. 푹 자게 손대지 말아야 하나.


탱이는 떨면서도 내 옆에 꼭 붙어 잠들었고 나는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탱이를 쓰다듬곤 했다. 함께 자는 것은 가장 취약한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탱이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몸의 떨림. 이 년쯤 지났던가. 탱이는 더 이상 내가 만져도 몸을 떨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탱이는 내게 한 번 더 왔다. 덜덜 떨면서도 내게 애정을 주었던 탱이가, 이제는 몸에 새겨진 두려움에서 벗어나 깊은 신뢰까지 주는 것이 느껴졌다. 내 손 위에 턱을 괴고 자기도 하고 만지는 대로 이리저리 뒹굴며 잠을 잔다.


트라우마를 잊고 안전하다는 감각을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고양이에게 이 년은 인간의 십 년보다 긴 세월이라고 한다. 탱이에게 “회복의 시간을 공유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면 아마 탱이는 “좋아서 옆에 있었을 뿐이야” 대답할 것 같다. “초면부터 작대기나 휘두르던 내가 왜 좋았어” 물으면 “아가야- 소리가 듣기 좋았어” 라며 날 위로할 것 같다.


침대 한가운데서 팔까지 쭉 뻗고 자는 탱이를 쓰다듬고 있노라면 회색 털이 부들부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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