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그녀들
아홉 살 때까지 부천 송내동에 살았다. 상가 건물 한 칸에 살았는데, 바깥쪽은 상점이고 쪽문 너머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있는 자그마한 곳이었다. 아직까지도 이웃 상가 주민 분들이 종종 생각난다. 옆집 언니, 빵집 아줌마, 설렁탕집 아줌마.
옆집 언니는 아주 어른이었는데 나를 예뻐해 줬다. 그 옆집에도 식당 뒤편에 쪽방이 있었고, 나는 거기에서 언니의 머리카락을 빗어주곤 했다. 어느 날은 언니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해주고 싶어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돌려가며 빗었는데 머리카락이 심하게 엉켜버려 빗이 빠지지 않았다. 언니는 화가 났는지 내게 소리를 질렀고,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그냥 줄행랑을 쳐버렸다. 쪽방을 나와 식당을 지나쳐 집으로 들어갔고, 그 뒤로 언니를 보러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한참을 언니를 피해 다니다가 우연히 식당 앞에서 언니를 마주친 날, 언니가 짧아진 머리로 “요즘 왜 놀러 안와”라며 나를 안아줬었다. 언니는 항상 “난 살이 찐 게 아니라 부은 거야. 봐봐. 부은 거지?”라고 말을 했었다. 언니가 몇 살이었는지 어떻게 생겼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부기가 빠졌을까?
옆 가게인 빵집에서 파는 빵 중 나의 최애는 크림빵이었다. 기다란 크림빵. 그 빵은 사백 원이었고, 나는 백 원밖에 없던 어느 날, 동생에게 백 원을 쥐어주고는 빵집에 가서 크림빵을 사 오도록 시켰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아기가 가면 빵을 주겠지”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빵집 아줌마는 동생에게 크림빵을 주셨다. 다음에도 같은 행동을 했던가. 어쨌든 나는 아직도 가끔 크림빵을 먹는다. 제 돈을 다 주고.
설렁탕집 아줌마는 투박한 듯 화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기가 아는 밭이 있는데 새벽에 그 밭에 가면 토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토끼를 보고 싶으면 여섯 시에 일어나 가게 앞으로 오라고 했다. 결국 나는 여섯 시에 일어나지 못했고 설렁탕집 아줌마의 토끼 자랑을 들으며 아쉬워하기만 했다. 그 당시 나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문구류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엄마가 모닝글로리를 운영했지만 내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별로 없었다. 다만 예뻐 보이는 것들을 유치원에 들고 가서 친구들에게 마구 선물로 주어 유치원 선생님이 엄마에게 걱정 어린 전화를 했다고. 어쨌든 그때 나의 간절한 소망은 “육공 다이어리가 가지고 싶다”였다. 다이어리는 삼천 원이었고, 나는 가끔 백 원을 가지는 아이였기 때문에 불가능한 꿈이었다. 나는 이 소망을 설렁탕집 아줌마에게 털어놓았다. 인생 최초의 고민 상담이랄까. 얼마 후, 엄마가 내게 다이어리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엄마에게는 얘기하면 혼날까 봐 말한 적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설렁탕집 아줌마가 내게 다이어리를 주라며 삼천 원을 엄마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명품 가방을 사도 그런 환희를 누릴 수는 없게 되었지.
심심하면 송내2동 동사무소에 놀러 가서, 그곳에 있는 그네 비슷한 놀이기구를 탔다. 중고 판매 용인지, 수거 용인지, 그런 철제 놀이기구가 동사무소 안에 왜 있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종종 가서 그걸 탔다. 어느 날 동사무소 아저씨가 와서 이걸 타면 안 된다고 나를 타일렀다. 여태 이렇게 많이 탔는데 왜 오늘부터는 안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린이 특유의 소심함으로 아무 말도 되묻지 못하고 돌아 나와서 다신 동사무소에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에 몰래 동사무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놀이기구는 없어져 있었다. 근처에 놀이터도 없고 공원도 없던 내게는 유일한 놀이공간이었는데. 그 뒤였나. 나는 책상 밑에 조용히 들어가 앉아있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좋았다. 엄마가 나를 찾아다니는 것도 좋았다. 찾고 나서 허탈하게 웃는 것도 좋았다.
다 좋았다. 나를 키운 송내동 여자들.
지금의 나를 보면 깜짝 놀라겠지? 그때의 그녀들과 동년배가 되어버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