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
그가 고백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의 그는 조금 이상하다. 지난번 까지만 해도 참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말도 없고 시큰둥하다. 점심도 먹었고, 카페에서 이야기도 나눴고, 해가 다 저문 바닷가를 말없이 걸었다. 더 이상 할 게 없는데.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빌어 멍석을 깔아줘 볼까.
“H씨, 술 한 잔 할래요? 좋은 곳 아는데.”
어라, 그의 반응이 또 시원찮다. 기분이 안 좋은 걸까. 내가 안 좋은 걸까. 나는 그가 좋았다. 조곤조곤한 말투도, 정갈한 맞춤법도, 깔끔한 옷차림도, 강아지 같은 느낌까지.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내 마음은 급한데. 결국 길 한복판에서 그가 걸음을 멈췄다.
“J씨, 우리 만날래요? 내가 서울 가도.”
대체 왜? 지금 분위기 좋은 바에 가는 중인데. 길 한복판에서 대체 왜? 사람들은 멈춰 선 우리를 스쳐 걸었다. 어색함을 무마하려 피식 웃으며 뭐예요 길에서, 들어가서 얘기해요, 하자 그의 표정이 꿍해졌다.
마주 앉은 그는 맥주잔을 바라보다 야경을 바라보다 할 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제 더 이상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결국 자백을, 아니 고백을 시작했다. 우리 사귈래요, 제가 금요일에 일찍 퇴근하고 부산에 오면 되거든요, J씨가 아프면 연가 내고 올게요, 어쩌구 저쩌구.
피의자의 자백을 드디어 받아낸 형사처럼 기뻤지만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다. 장거리 연애를 어떻게 해요, 만약 내가 아프면 어떻게 할 건데, 어쩌구 저쩌구, 알았어요.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가려는 내게 그가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줘도 돼요? 바래다주고 싶은데.”
이렇게 서울 사는 부산 남자와 부산 사는 서울 여자가 연애를 시작했다.
그 후로 계절이 몇 번 바뀌었고 그를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고백하던 날 그의 행동들만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너 그 날 진짜 이상했어 말도 없고 갑자기 길에서 고백하질 않나, 하니까 그가 부끄러워하며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었다.
"사실 그 날 하루 종일 어떻게 고백할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밥도 먹었고 커피도 마셨고, 이제는 정말 고백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망설이는 찰나 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거야. 술김에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어. 맨 정신으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걷다 보니 이미 바 앞에 도착해버린 거야. 들어가기 전에 지금이라도 말해야겠다 싶어 길에서 고백해버린 거지."
그제야 길 위에 멈춰 선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렇게 처음부터,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