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도 잘 찍어주시겠지...?
저는 의도적으로 직업이 제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3을 넘지 않도록 신경 쓰며 살아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요. 일을 떠나서도 범죄 사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고요. 퇴근 후에도 범죄 관련 영상물을 많이 접하고 추리 소설을 읽고요(요즘은 써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1/3은 휴식에, 1/3은 발전에 분배함으로써 일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해요. 아름답고 선한 것을 찾아다니고요. 나름의 균형추랄까요.
직업 외에도 다른 삶의 조각들을 나누어 볼게요.
결혼 이야기를 해볼까요.
2022년의 가장 큰 이벤트라 할 수 있겠네요.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왔던 저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막연히 '결혼 안 할래'라고 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의 결혼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완벽히 다르더라고요. 내가 가만히 서있기 위해서 그를 계속 몰아내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다 문득, 이 사람과의 결혼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어느 날 "아직도 결혼 생각이 없어?" 조심스레 묻는 남편에게
"너랑 하면 하고. 아니면 말고."라고 답했어요.
그 뒤로 남편은 요즘의 결혼 문화에 대해 검색을 했나 봐요.
어느 날은 어렵게 말을 꺼내는 거예요.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런 거 없이 바로 물어봐도 돼." (무슨 질문을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제가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죠? 쿠션어의 정서적 효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이라 단도직입적인 걸 선호합니다...)
"같은 가격이라면 반지가 나아, 가방이 나아?"
대체 이건 무슨 질문이지. 밸런스 게임인가 그건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얼만데?" 묻자 그제야,
블로그에서 봤는데 요즘은 프로포즈 링 대신에 가방을 하기도 한대. 그게 더 실용적일 것 같기도 하고... 라며 글로 배운 결혼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정말로, 가방을 사고 근사한 호텔에 커다란 꽃다발까지 준비했더라고요.
이런 일반적인(?) 방식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지만 성심껏 준비한 모습이 참 사랑스럽잖아요.
그래놓고는 와인 두어 잔에 취해서 반쯤 잠든 채 "맞다, 프로포즈 해야 되는데" 이러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얼렁뚱땅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웨딩 촬영이나 결혼식도 가능하면 생략하고 싶었어요.
근데 남편이 또... "친구들 말 들어보니까 웨딩 촬영은 진짜 재밌대"라며 꼬시기 시작합니다.
기왕 찍을 거면 세트장에서 찍기보다는 야외 촬영을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한때 사계절 웨딩 스냅을 찍어보자고 의기투합했던 적이 있기도 했거든요. 한 번 찍고 다신 못하겠더라고요. 체력박약으로...)
제주 웨딩 스냅을 예약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회사에서 미국 출장을 제안받았는데, 웨딩 촬영 일자와 겹친다고 출장을 거절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하아...)
"사진은 나중에 찍어도 되잖아. 얼른 다시 가서 출장 가겠다고 해."라는 단호한 저의 말에 남편은 결국 출장을 가게 됐어요.
그리고 저는 여러 고민 끝에 9월에 대학원을 복학하기로 결정했고요. 복학하면 결혼할 여유가 없지 않을까 싶어서 기왕 하기로 한 거 후딱 하기로 했어요.
"호텔에 전화해서 가장 빠른 날 언제 되는지 물어봐봐."
"8월 13일이래."
"복학 전에 결혼하고 신혼여행 다녀오면 딱 맞겠다."
이렇게 결정된 결혼 날짜.
가족식으로 간소하게 치를 예정이었기에 빠른 진행이 가능했어요. 양해해 주신 부모님들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결혼이 두 달 앞으로 결정되자, 웨딩 촬영을 하러 제주도까지 가는 게 어려워졌어요.
저희의 일정도 바빴지만, 성수기 제주의 항공/호텔/렌터카 예약, 스냅 작가님과 일정 조율, 드메 업체와 일정 조율, 제주도의 태풍/장마까지 고려하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혈흔형태분석 교육에서 친해진 주임님이 떠올랐어요.
현장감식 사진을 잘 찍으시기로 유명한 분.
살아있는 사람도 잘 찍어주시겠지...?
(교육 때도 촬영 담당을 맡아주셨던)
"주임님, 여차저차해서 웨딩 촬영을 저희끼리 간소하게 하려고 하는데요, 찍어줄 사람이 없어요..."
"언젠데요? 도와줄게."
저희 둘의 의미가 잘 반영되도록 컨셉 구상을 많이 했어요. 유튜브를 보면서 웨딩 촬영 자세에 대해서 공부도 했고요. 드레스는 알리에서 구매했고, 꽃은 꽃시장에서 사 왔어요.
스튜디오를 두 시간 빌려 촬영한 결과물이에요.
여느 살인 사건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촬영해 주신 주임님 감사합니다.
프로그래머인 남편과 경찰인 저의 이미지를 유쾌하게 담고 싶었어요. 친구들이 엄청 재미있어하더라고요. 수갑은 다이소제, 총은 비비탄입니다.
(저는 찍히는 사람보다 찍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가족식으로 진행하는 게 아쉽다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결혼 파티도 준비했어요. 사랑하는 책방 한탸에서 남편을 소개하고 '결혼할 결심'을 나누었습니다.
서울, 인천, 대전에서 와준 친구들, 책방의 친구들, 저를 모르는 친구들까지 어우러져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자고로 파티에는 서프라이즈가 있어줘야... 친구들의 영상편지를 보고 뿌에엥 하고 있는 남편입니다.
결혼 파티를 기획하고, 명탐정 코난 주제가에 맞추어 축무를 춰준 인간화환 소연샘. 정말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잊지 못할 공간인 한탸는 얼마 전 문을 닫았는데요... 마지막까지도 제게 공간과 마음을 내어준 석화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렇게 우당탕탕,
결혼식을 했습니다.
결혼식도 재미있었어요. 소수의 인원만 초대한 덕에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마음을 받았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김하연 작가님이 직접 찍으신 삼팔이 사진으로 결혼 기념우표를 제작해 주셨어요. 우편으로 전송된 청첩장에는 삼팔이의 아련한 눈빛이 담겼습니다.
집에서 가족사진도 찍었어요. 남편이 봉이를 안고 있고 제가 탱이를 안고 있습니다.
탱이는 이제 저보다 남편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요. 탱이에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게 기뻐요.
봉이도 집사가 하나 더 생겨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예상치 못했던 결혼을 급히 하고 나니 큰 파도를 황급히 잡아탄 서퍼가 된 것 같아요.
이 바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떻게 결혼할 결심을 하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프로파일러는 남자 보는 눈이 다른가?
다음 글에서는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정리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