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는 상상하는 대로 되지만 아마는 걱정하는 대로 된다.
재밌는 사실이 있다.
지금 내가 프로인지 아마추어인지에 대해 바로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게 되었다. 먼저 내 미래에 대해서 나아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요소를 막연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월급 통장에 얼마가 찍힌다던지, 어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던지, 얼마큼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는지, 그걸 통해서 뭔가 내가 성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성공이다. 그 이후엔 그 요소를 이루기 위한 절차를 지금의 나에서부터 시작해 순서대로 상상해 본다. 상상이 잘 안 된다면 펜으로 정리해 가며 적어도 좋다. 만약 내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요소에 내 계획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하거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다소 억지로 정의를 하게 되면 지금 본인이 아마추어 일 수 있다는 첫 번째 반증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반증을 찾게 되었다면, 평소 본인이 하는 생각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혹시 현재 스스로가 갈증 하는 상황에 걱정을 하면서 떠올린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본인의 성공 요소에 대입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해 정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배우가 되고 싶은데 오디션은 계속 떨어지고 생활비가 없다는 이유로 연기 연습 또는 오디션에 쏟는 시간보다, 혹은 동등한 시간만큼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일을 하고 있다거나, 직장인 입장에서 이 회사의 미래가 여러 이유로 어둡다 생각하다는 이유로 이직을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예시에 포함된다. 당연히 배우 커리어 또는 직장인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이와 같은 갈증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은 필요한 요소가 맞다. 그러나 갈증을 보완하는 방법이 성공과 맞닿아있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여러 갈증을 겪을 때마다 빠르게 갈증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리고 선택을 해온 것 같다. 학창 시절엔 공부가 하기 싫어서 하고 싶은 걸 찾아냈고, 대학에 졸업하고 나선 돈이 없다는 이유로 예술 커리어를 놓고 회사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회사원인 나는 커리어에 대한 갈증을 또 다른 선택으로 찾아야 하는 고민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했었다. 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프로는 상상하는 대로 되지만 아마는 걱정하는 대로 된다.]라는 문장을 스스로 새기기 전까진 나의 삶의 모든 선택은 늘 문제를 우회하여 해결하는 방법으로써 작용했다.
그래서인지 뭐든 프로페셔널하지 못했다. 뭐든 적당히 알지, 진지하게 뭘 알거나 행하진 못했다. 다른 것에는 디테일의 중요성을 매번 뱉어대면서 말이다.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많은 고통을 사실은 겪고 싶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과정을 성공하기 위해 무조건 겪어야만 하고, 겪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고, 더 큰 문제를 받아들일 걸 겸허히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성공을 위한 챕터를 하나하나 그리다 보면 중간 단위에서 안 그려지는 때가 있다. 거기까지가 나의 레벨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일 수 있겠다. 인정하되, 그려지지 않는 부분을, 그리고 마주하게 될 모든 문제들을 우회하지 않고 직관으로 뚫어내서 문제를 흡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성공을 위한 상상이 더욱 수월해졌다. 어떻게, 얼마큼, 왜 이 성공을 맛보고 싶은지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뇌는 상상을 위해 굴러가다 보니 걱정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나는 무조건 성공할 것이고, 이젠 더 이상 우회하지 않을 것이다.
2.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안 하게 되는 건 늙었다는 반증이다.
얼마 전에 [사랑의 하츄핑] 영화가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예매해서 볼까?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이 들면 멍청한 짓이라도 큰 고민 없이 바로 행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 내가 SNS 관종이기 때문인 것이 큰 것 같다. 엉뚱하고 무모한 짓을 초등학교 때부터 해왔고, 재밌다고 생각하는 일을 타인한테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성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회고를 해보면 그게 사람을 좋아하는 데도 크게 작용했지만, 몇 사람에겐 상처를 주는데도 작용한 것 같다. 좋은 건 좋은 거지만,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나쁜 게 맞다. 이제 와서 사과하기엔 나 역시 모든 기억을 잃은 것 같고, 그냥 내가 그랬다는 사실을 스스로 평생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하츄핑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더우니까 굳이 나가지 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 큰 감회를 느꼈다. '내가 엉뚱한 짓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니?' 그 감회는 돌멩이처럼 내게 빠져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나를 울렁였다. 그러면서 내가 늙어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이전에 해왔던 것을 절제하거나, 혹은 놀이 같은 것을 잘 안 하게 되는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 크다. 그러면서 늙어간다는 건 뭐가 됐든지 안 하게 되면 이를 반증하게 되는 것 같다는 정의까지 하게 되었다.
단순히 늙기 싫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뭔가를 자꾸 안 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의식적으로 뭔가를 하려는 것 같다. 어차피 나도 흙으로 언젠가 돌아가 모든 것을 안 하게 될 때가... 유일하게 하는 것은 잠들어 있는 것 밖에 안 할 때가 오겠지만 그전까지 최대한 많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하게 될 때를 필연적으로 맞이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의식적으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합리적이다.
3. 아무리 삶이 슬퍼도 아침엔 웃으며 인사하면 좋다. 그럼 웃으며 화답해 주는 이들을 보고 삶이 좋아진다.
내가 요즘 가장 큰 영감을 받는 사람은 다른 이도 아닌 아파트 경비 선생님이다. 아마 60대 중반쯤 되시는 선생님인 것 같은데, 1년 넘게 안내데스크에서 마주치면서 웃는 얼굴과 극존칭의 인사를 해주신다. 나도 처음엔 그 모습에 기분은 좋았지만 낯부끄럽다는 이유로 목례를 해왔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 역시 웃으며 인사를 하게 되었고, 나아가 인사를 안 해주시는 다른 경비 선생님께도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종종 집을 오고 나가면서 경비 선생님의 환한 인사를 받게 되면 하루의 시작이 좋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이 행동을 단순히 받지 않고, 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할 수 있는 건 아침에 회사 직원 분들께 웃으며 인사하기였는데, 물론 아직은 의도적으로 웃으며 건넨 인사가 상호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래도 계속해야겠다 싶었다. 나도 어색했었고, 지금은 웃으며 인사하니까. 그러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웃으며 하루를 시작할 거고, 이 영향력을 펼쳐낼 거다. 팍팍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건 우리니까, 우리가 다시 세상을 부들 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다.
4.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그 외 것은 다 작은 것.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결국 사람이다. 사람이 걱정을 하지 않게 되는 방법,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방법, 행동의 힘을 믿는 방법, 긍정의 힘을 나누는 방법... 모든 것이 다 사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나부터 자꾸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이 진짜 큰지에 대한 정의를 해야겠다. 돈, 성공, 명예, 차, 비싼 밥, 좋은 집... 물질적인 것도 그렇고, 사랑, 일, 스트레스, 사람 관계와 같은 정서적인 것도 그렇고... 각 요소들이 정말 내 행복한 삶을 위한 '주체'로써 활용되는지, 주체라면 어떻게 이들에게 에너지를 보내야 하고, 아니라면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그 정의 기준을 '나'와 '사람'으로 세웠다. 늘 해왔던 말처럼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야 내가 행복하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정리할 수 있었다. 결국 사람. 사람이다.
참으로 재밌는 사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