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정 Jun 24. 2020

당근마켓과 그 적들

이사를 오고 난 후, 이사 전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은 쓸만하지만 마땅히 둘 데가 없거나 쓸 데가 없는 물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다가 '당근마켓'을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물건을 버리는 주기마다 당근마켓을 자주 활용하고 있지만, (지난달엔 무려 5만 원 상당의 수입을 기록했다) 할 때마다 '다시는 당근마켓 안 한다'라고 중얼거리며 다짐하게 된다. 매너 좋은 이웃들도 있었지만, 심심찮게 당근마켓 빌런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당근마켓 빌런들을 유형별로 나눠보면 아래와 같다.


1. "목적지까지 10km 남았습니다." 내비게이션형

거래 약속을 '오후 7시, OO역 3번 출구 앞'으로 정하면 오후 7시에 만나면 되는데, 그전부터 친절히 연락이 온다. "출발할 때 연락드릴게요." 처음에는 이 말이 7시에 만나기 위한 사전 안내 정도로 생각했는데, 내비게이션형의 이 말은 출발하는 시간에 따라 도착 시간도 달라질 테니 맞춰서 나오라는 뜻이다. "지금 출발했어요." "15분 후 도착이라고 뜨네요." 계산해 보면 7시가 넘는 시각이다. 네, 그럼 7시 10분까지 갈게요.라고 대답하고 맞춰서 나가면, 계속 메시지가 온다. "다시 10분 남았다고 뜨네요." "5km 남았어요." 운전하면서도 시시각각 내비게이션 상황을 중계해준다. 아니, 그냥 제발 오후 7시까지 오시면 안 되나요. 현재 위치는 말씀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2. "어머, 제가 미쳤나 봐요." 내 머릿속의 지우개형

정확히 두 번 경험했다. 출근길에 더 일찍 약속 장소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메시지를 보내도 연락이 없다. 나타나지도 않는다. 출근 시간은 다가오니, 포기하고 물건을 들고 회사에 출근한다. 그날 오전 11시쯤 메시지가 온다. "제가 정말 깜빡했어요."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약속 장소로 물건을 들고나간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메시지를 보낸다. 답이 없다. 불길하지만, 어쩌면 나올 수도 있지 싶어 몇 분을 더 기다리다 들어온다. 오전 11시쯤 지금 일어났다는 메시지가 온다. 사람의 일이라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출근 시간, 주말 아침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약속을 지키기 어려운 시간은 피해서 잡아주세요.  


3. "제가 사려고 했는데, 너무하시네요." 궁예 세계관형

메세지로 사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이웃이 있으면, 바로 '예약 중'으로 물건의 상태를 바꿔 놓는다. 메세지로 물건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봐서 대답은 했는데 사겠다, 사고 싶다는 말이 없는 경우에는 사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다른 이웃과 거래 약속을 잡게 된다. 가장 처음 메시지를 보내 물건에 대해 질문을 했던 이웃이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 자기가 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팔기로 했냐며 화를 냈다. 아니, 저의 이 몇천 원짜리 작은 중고 물건 때문에 화까지 내실 일인지... (말을 안 했으니) 구매하고 싶으신 줄 전혀 몰랐다고 달래서 넘어갔지만... 사고 싶으면 사고 싶다고 마음을 털어놓자. 판매자는 궁예가 아니다. (누가 당근 소리를 내었는가...)  


4. "집 앞이야, 나와." 구남친형

약속 시간과 장소를 잡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모두 다 나름의 일정이 있고, 집에 있다고 해도 바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무턱대고 주소를 알려주면 지금 집 앞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정말로) 종종 있다. 지금 집에 있긴 하지만 그렇게 만날 순 없다, 중고 물품 판매자에게도 개인 일정이란 게 있다고 설명을 해야 한다. 당근마켓은 핸드폰 번호 등의 개인 정보 공개 없이 동네에서 만나서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인데 집주소를 알려달라는 이웃을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오후 9시고 10시고 (날 위해) 우리 집 앞에 온다는 이웃에게는 구남친상을 수여한다.


위와 같은 여러 고충을 겪고 나면 당근은 무슨 당근, 그냥 다 버리자 싶을 때도 있다. (실제로 몇몇 물품들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거나, 그냥 버렸다.) 쓰던 물건을 처리하기가 이렇게 어렵고, 나에겐 소중해도 남에게는 그저 몇천 원짜리 물건이라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 새로운 물건 하나를 집에 들여놓을 때 더욱 신중해진다. 중고 거래는 이웃과의 나눠 쓰기도 가능하게 하지만, 나의 소비욕을 줄이는 데도 꽤 효과가 있다. 그리하여 겨울밤, 30분을 추위에 떨며 약속에 늦는 내비게이션형 이웃을 기다리다 다시는 당근마켓을 안 한다고 말 한 사람 치고는 꽤 오래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팔고 있다.



제목은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정말 제목만 따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배는 삼세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