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정 Jul 23. 2020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 글 money, money, money 에서 대출을 앞두고 작아진 마음을 이야기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내가 돈을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를 쓰고 있는지, 얼마를 갚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 시점에서 나의 금융 생활을 돌이켜 보게 됐다. 월급이 들어오면 대강 쓰고, 대강 넣어두고, 은행원의 권유에 따라 적금을 넣는 정도의 적당한 금융 생활을 살아온 나로서는 정확한 예산 설정이 어려웠다. ‘가계부’라는 것이 쓰면 좋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들었지만, 정확히 왜 써야 하는지는 전혀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좋다니까 시도는 했다. 주로 문명의 이기에 기대는 방식으로. 카드 문자를 복사해서 붙이기만 하면 된다는 유료 가계부 앱도 사봤고, 계좌와 카드 정보만 넣으면 저절로 계산을 해주는 자산 관리 앱도 깔아봤다. 매번 꾸준히 기록하리라 결심했다가도 일주일이 못 가 흐지부지됐다. 돈을 처음 벌기 시작했을 때, 돈을 모으는 목표가 분명했다면 달랐을까. 한몫 챙겨서 이 바닥 뜬다는 마인드로 계획을 세웠어야 했는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때이지만 그나마도 감사하며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쓰고 싶지 않아도 얼마를 쓰고, 얼마를 갚고, 그게 얼마나 걸릴지 계획을 세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알아야 더 크게는 내가 얼마나 일하고, 얼마나 쉬고, 언제 은퇴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있을 터였다. 1인 가구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신예희 작가님도 15년 넘게 가계부를 10원 단위로 정리하셨다는 말에 힘을 얻었다.


가계부를 쓰고 주기적으로 통계를 내어 자산 현황을 파악하자. 내 손에서 얼마의 돈이 오가는지, 그 숫자에 익숙해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우선 생활비를 약 30일로 나누어 하루의 예산을 가늠해본다. 하루에 이 정도 쓰면 되는구나, 라는 걸 눈으로 보는 것이다. (..) 나는 15년 넘게, 10원 단위로 정리하고 있다.

-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 신예희 지음


이미 사놓은 유료 앱, 첨단 자산관리 앱을 뒤로하고 나는 엑셀에 가계부를 적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많은 재테크 블로거, 유튜버들이 엑셀 가계부를 무료로 공유해준다. 그중에서도 난 은주 님의 엑셀 가계부를 다운로드하여 이용하고 있다. (은주 님은 가계부를 가감 없이 공개하며 가계부 쓰는 법을 공유한다.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서 매일 엑셀 파일을 열어 그 날의 소비를 기록했다. 가계부를 적다 보니 쇼핑도 별로 안 좋아하고 소박한 내가 한 달에 이만큼 쓸리 없어,라고 생각했던 금액을 내가 한 달 내내 착실히 소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매달 나가는 고정 지출을 정리하다 보니 궁금한 것도 생겼다. 집에서 쓰고 있는 무선 인터넷이 꽤 비싸네. 계약이 언제 끝나는 거지? 핸드폰 기계값 할부도 없는데, 요금이 왜 이렇게 비싸지? 더 싼 요금제는 없나.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돈들을 모아 놓고 나니 꽤 컸다. 핸드폰은 약정도 없는데 비싼 요금제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알뜰폰으로 변경했다. 이전보다 저렴한 비용인 3만 원대로 인터넷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 무선 인터넷은 약정 때문에 당장 통신사를 바꿀 순 없지만,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을 기록해 뒀다. 구독하고 있던 여러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들도 하나로 줄였다. 지금은 8천 원 대의 유튜브 프리미엄 멤버십 요금만 내고 있다. 생각해보지 않았던 지출들을 줄이면서 가계부를 써나갔다. 그리고 매달 남는 돈이 10만 원이라도 있으면 대출을 상환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은 이자 금리가 낮기 때문에, 안 갚아도 된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열심히 찾아봤다. 주택담보대출금을 먼저 갚아야 한다 VS. 주택담보대출금은 제일 나중에 갚아야 한다. 두 의견 모두 존재했다. 제일 나중에 갚으라는 조언은 주택담보대출은 이자 금리가 대체로 낮으니 그보다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투자금으로 활용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였다. 바람직한 이야기지만, 투자라고는 적금밖에 몰랐던 나에게 이자 금리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투자는 아직 먼 이야기다. 지금 내 눈앞의 대출금을 상환하는 게 나에게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대출금을 갚고 있다.


Photo by NORTHFOLK on Unsplash


이 돈을 언제 다 갚지... 하는 막연함에 한 달에 10만 원을 상환하는 게 바닷물에 돌멩이를 던지는 걸로 느껴질 수도 있다. 1인 가구인 우리 집의 가장(=나)이자 재무 총책임자(=나)로서 매달 차근차근 계산을 하다 보면 바다까진 아니고 호수 정도로 느껴지게 된다. 호수도  막막하지만... 최근에는 가계부를 2년째 쓰고 있다며 제법 잘난 척을 하며 친구 K에게 가계부 쓰는 법을 가르쳐 줬다. 1인 가구 재무 총책임자들의 심도 깊은 논의랄까. 아직 시작하지 않은 재무 총책임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권유하고 싶다. 가계부를 시작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거실이 생겼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