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랄드 펜넬 <프라미싱 영 우먼>
에머랄드 펜넬Emerald Fennell 감독의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을 아카데미 기획전으로 뒤늦게 챙겨 보았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택한 결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영화는 한 클럽에서 남성들의 하반신을 타이트하게 클로즈업한 슬로모션 롱테이크로 시작된다. 앞으로의 플롯 전개에 대한 힌트를 주는 동시에, 미디어가 답습해온 여성의 특정 신체부위를 향한 불필요한 혹은 과도한 카메라의 시선을 남성에게 돌리는 이 오프닝은 영화가 의도 전달을 위해 가차 없이 직진할 것임을 예고한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영화의 태도에 대한 이 선전포고를 받아들여야 조금은 수월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목표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전개가 입체적이지 못한 면도 있다. 그보다 주목하고 싶은 건 노골적인 화법을 취하는 이 형식주의적 영화에서 그 어떤 사실주의 영화보다도 실제 같은 순간을 더 마주친다는 것이다. 환상성을 띠는 이야기에나 어울릴 법한 미장센과 편집 방식으로 현실과 똑 닮은 이야기를 만들었으니 (판타지에 가까운 사건으로 영화가 끝맺기는 하지만), 대다수 관객이 받을 어딘가 거칠다는 느낌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다. 또한 영화는 복수를 행하는 주인공 캐시 이외 다른 인물들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다층적인 인간의 기본적 특질을 간과한 채 얄팍하게, 상징적으로만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가해자와 주변인들이 ‘프라미싱 영 우먼’ – 피해자 니나 – 을 바라보던 방식을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연출의 의도적 선택일 것이다. 이렇듯 이야기는 픽션이라는 특성을 십분 활용해 가상현실 속에서 일련의 전복을 꾀하며 진행된다.
그럼 여기서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뭘까. 현실성 떨어지는 영화의 형식, 아니면 현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어떤 의미로든 ‘작정하고 만든’ 영화다. 지나치게 직설적이라 드는 아쉬움보다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예술의 모방 객체가 된 현실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더 크다.
영화 속 또 하나의 과잉적 요소는 음악이다. 주요 사건마다 화면을 장악하는 노골적인 컬러톤과 극단적 앵글 위로 ‘It’s raining men’, ‘Toxic’ 같은 귀에 익은 팝송이 흐른다. 과장된 사운드로 삽입된 흔하디 흔한 대중가요는 이 끔찍한 사건들이 먼 세상이 아닌 주변의 이야기이며, 현실 속 누군가의 일상에 깊게 침투한 고통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 캐리 멀리건의 호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 ‘이 세상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예쁜 바보가 되는 것’이라 처연히 읊조리던 데이지가, 상처 입은 친구를 위해 복수의 칼자루를 쥔 캐시가 되어 나타났다. 결국은 무책임한 도피를 택했던 ‘careless people’의 이름표를 떼어 버리려는 듯, 캐리 멀리건은 이 직진하는 영화에 제대로 가속도를 올리는 멋진 연기를 펼친다.
그래서 통쾌하냐고? 글쎄, 밤마다 만취 연기로 불순한 의도를 지닌 남자들에게 행하는 캐시의 복수를 보면서, 응징했다는 통쾌함보다는 또 다른 피해자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이 앞섰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영화는 결국 캐시의 미소로 끝을 맺지만 결코 함께 웃을 수 없는 결말은 길고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현실을 반영하는 불가피한 영화이지만 더 이상 이런 영화가 ‘필요하지’ 않게 되는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잘못이 없으면 복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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