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금 떡 케이크 만들기
달리는 광역버스 안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멀미에 취약한 나는 차 안에서 책을 보거나 휴대폰을 하는 건 꿈도 못 꾼다. 기껏해야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게 전부다. 그렇게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야 하는 순간이 참 좋다. 이때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별 구경거리 없는 밋밋한 바깥 풍경도 이어폰으로 나오는 음악과 함께 그럴싸한 독립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유독 햇살이 나른했던 날, 떡케이크를 만들러 가던 길이 무척 아늑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들어선 스튜디오의 벽 곳곳에 아름다운 유화가 붙어있었다. 이 분위기에 이미 속수무책으로 몽글몽글해진 나는 자리에 앉아 두 손바닥 만한 백설기 한 덩이를 받았다. 떡과 앙금이라는 동양적인 재료로 서양의 명화를 아이싱하는 수업이었다. 보통 케이크나 쿠키에 크림 같은 재료로 꾸미는 작업을 아이싱이라고 하는데 떡에 아이싱이라니 꽤 낯설었다.
그림은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골랐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면서 몇 장 사진을 엄마한테 보냈는데 엄마는 아몬드 나무가 좋다고 하셨다. 여태껏 나는 벚꽃나무인 줄 알았다.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조카에게 준 첫 선물이자 그의 37년 인생 마지막 봄에 그린 마지막 꽃그림이라고 한다. 알고 나서 더 그래 보이는 것이겠지만, 밝고 예쁜 색감의 이 그림은 선물로 참 제격이었을 것 같다.
앙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꾸덕한 물감을 사용하는 유화와 얼추 비슷한데, 색을 만드는 작업이 무척 재미있다. 식용색소에 이미 준비된 민트색이 있지만 민트색 하나만을 바로 쓰진 않는다. 짙은 올리브색과 울트라마린을 아주 살짝 섞어 좀 더 깊은 색을 만들었다. 음식에 대해 묘사할 때도 그 맛의 층이 깊을수록 맛있는 요리라고 하는 것처럼 여러 겹의 퇴적층이 만드는 맛과 멋이 있다.
나뭇가지를 올린다. 자세히 보면 나뭇가지도 하나의 색이 아니다. 짙은 갈색 위에 갓 돋은 줄기 부분은 좀 더 여린 느낌의 녹두색을 얹는다. 작은 디테일이 큰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는 그런 디테일이 생각보다 많은 그림이었다. 하나하나씩 보고 따라 만드는 덕분에 그림을 꼼꼼히 감상한다.
꽃잎을 얹을 때는 나이프화와 가장 비슷했다. 꽃잎 한 장 한 장의 느낌을 살리고자 앙금 한 덩이를 푹 떠서 한 잎씩 붙였다. 그리고 노란색 수술과 이파리를 조금 더 칠해준 뒤 mom♥이라는 레터링으로 마무리했다.
식탁에 모여 케이크에 촛불을 켰다. 촛불을 켜기에는 말 그대로 손바닥 만한 작은 케이크였지만 네 식구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조금씩 떼어먹었다. 엄마는 한참을 칼질을 못하고 이걸 어떻게 자르냐며 동동 발을 굴렀고, 아빠는 카카오스토리에 올리겠다며 사진을 찍었다. 괜히 쑥스러워 뭐 별거라고 그러냐고 했지만 내심 기뻤다. 선물을 하면 대개는 되려 내가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든다. 아빠는 Dad가 없는 것에 섭섭해하지 않았지만 다음번에는 Dad♥, Grandma♥도 쓸 거다. 선물은 원래 주는 사람 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