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
지난 일요일 아침 옆으로 누운채 반쯤 감은 눈으로 인스타를 보다,
크게 하품을 한 순간, 오른쪽 턱이 움직이지 않았다.
턱이 빠져 버렸다.
왼쪽 턱은 제 위치로 돌아왔는데 오른쪽 턱은 돌아오질 못하니,
억지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아파서 정말 오랜만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거실에서 꺄르르 웃던 선호와 아내가 깜짝놀라 방으로 왔다.
다행히 턱은 돌아왔는데 통증은 여전했다.
조금이라도 입을 크게 벌리면 또 턱이 빠질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양치를 하다가 오른쪽 턱이 딸깍 하더니 턱. 빠져버렸다.
다시 으아악 비명을 질렀고, 선호와 아내가 놀란 얼굴로 걱정했다.
통증을 수반한 채 턱은 다시 돌아왔다.
고통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내 삶은 대부분의 시간은 안온했지만, 견뎌내기 힘든 불행으로 가득했던 시간도 있었다.
강한 통증이 비명으로 표현되듯, 불행이 견디기 힘들 땐 글을 썼다.
불행이 언제 반복될지 모를 때 찾아오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나만의 처방이었다.
언제부턴가 글을 쓰지 않았다.
로스쿨 공부가 너무 고되기도 했고, 이미 읽고 쓰는 일은 정말 나의 ‘일’이 되어 버렸기도 했고,
딱딱한 법률문장에 익숙해지다보니 자유로운 형식으로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고, 책을 읽지 않다보니 글감도 떠오르지 않았고, 육아도 하고.
이런 저런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더이상 불행이 반복될것만 같은 불안감이 해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딸깍 소리를 내며 오른쪽 턱이 빠졌을 때, 놀란 눈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아내와 선호를 보니 이내 안심이 되었다. 통증은 여전했음에도.
턱이 빠진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어찌되었든 고통도 사그라질 테니까.
젤리 내복을 입은 배가 볼록 나온 선호와 염려스런 눈빛으로 나를 감싸던 아내가 옆에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선호가 낮잠을 자는 동안 병원을 알아보고, 커피 한잔을 마셨다.
오랜만에 읽은 책 구절이 기억에 남았다.
“17세기 프랑스 궁정 사회에서는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이라는 공식 같은 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 표현은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어떤 것의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 온갖 상황에서 칭찬의 말로 사용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알 수가 없군요.’라는 뜻을 지닌 ‘알 수 없는 무엇’이라는 표현은 원래 깜짝 놀라 말문이 막혀버린 모습을 의미했다. 궁정 귀족의 완벽한 외모, 우아한 시구의 울림이나 재치 있는 말처럼 독특한 특성을 지닌 아주 아름다운 것을 강조할 수 있는 달변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임시방편으로 이 같은 관용적 표현을 미사여구로 사용했다.” - <예술이란 무엇인가> / 볼프강 울리히 지음 / 휴머니스트
초저녁에 되어서야 잠에서 깬 선호에게 약속했던 포니랜드는 다음주에 가자고 이야기했고,
집 앞 개천으로 나가 돌을 던지며 놀았다.
어느덧 쌀쌀해진 가을밤 공기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했다.
아내가 차려준 쭈꾸미 볶음, 된장찌개, 고등어 구이에 장모님이 해주신 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스피커에서는 앙드레 가뇽의 ‘아름다운 인생’(Petit Cantique Profane)이 흘러나왔다.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
내 삶이 예술’적’이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