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예술이 되도록
새해 다짐 중에 몇 가지가 기억난다.
1. 버티는 삶이 비루해지지 않도록 하자.
2. 일기를 쓰자.
일기는 하루에 몰아서 쓰는 날이 많기는 하지만 매일의 기록을 하고 있다.
버티는 삶이 비루해지지 않도록 하자는 목표는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것으로 귀결한다. 보다 명확히는 일의 의미일 것이다. 삶의 의미는 이미 가족의 존재로 충만한 상태이니.
일의 의미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첫째는 돈이고 둘째는 커리어고 셋째는 보람이고 넷째는 관계고…
꼬리를 물고 목표를 설정할 수 있지만, 돈, 커리어, 보람, 관계 등등 회사의 구성원 혼자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돈은 나의 가치에 대한 회사와 나 사이의 입장차, 개업 또는 개원을 했을 때의 기회비용, 주식의 가치 등등이 종합되어야만 한다.
커리어는 어떤가. 회사에서 내가 쌓기를 원하는 커리어는 정해져 있다. 로펌을 선택하지 않고 스타트업으로 온 결정이 보상받기 위해서는 꼭 가져가야 하는 이력이 하나 있는데, 아직은 공개하기 어렵다. 과연 전문성이라는 것이 쌓이고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여전히 따라온다.
백오피스 또는 미들 오피스 업무에서 일의 보람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지위가 높으니 각 사업부서의 의사결정(때론 형사처벌 이슈가 포함될 수도 있다)을 왜 안해주냐는 볼멘소리가 연간 동료 회고에 기록되기도 한다.
(“당신이 형사처벌을 당할 수 있는 결정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일이 잘 되었을 때의 성과는 사업부서가 가지고 가고 잘 안되었을 때 리스크는 법무에서 가져가는 것이 타당한가요. 저의 처우가 회사의 모든 리스크를 쥐고 갈 정도의 처우가 아닐 텐데요.” 등등의 말은 혼자 삭혀야만 한다.)
다음으로 관계를 보자. 사내에 변호사가 1명이고 법무조직원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자유롭거나 고립되거나 둘 중에 하나다. 관계 형성에 한계가 있고, 특히나 항상 나이스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자가 스트레스로 감정이 흔들리면 ’흑화‘ 되었다는 피어리뷰가 뒤따라온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일을 함에 있어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과거의 나의 실책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과거의 나의 실책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이는 회사의 입장과는 무관한 나 스스로의 기준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오롯한 나의 책임이다.
이전까지는 버텨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게 어려웠다면, 이런 때에는 버티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해결해야 하고, 따라서 버틸 체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책을 읽는다.
오늘 새벽 눈을 뜨고, 아내가 선물해 준 앙리 카르띠에 브레송의 <영혼의 시선>을 완독했다.
사진의 예술로서의 지위는 결국 진리를 담은 구도에 우연성이 개입함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 나름의 결론이다.
브레송의 에세이를 읽고 조금 더 구체화 할 수 있었다.
인생이 사진과 닮아 있는 지점도 이와 같다. 내 맘대로 되는 건 맥심 커피믹스 밖에 없다. 사실 커피믹스도 내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결국 사람은 서로가 기대어 버티는 것이기에 통제되지 않는 우연성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를 통해 삶 또한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