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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작가 Mar 24. 2024

'알 수 없음'의 불안함

스리랑카 기차사고를 목격하며

2024년 1월 22일 스리파다 근처 날라타니야라는 동네를 떠나 하푸탈레로 이동하는 날이다. 하푸탈레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버스로 해튼역까지 이동하고 해튼역에서 하푸탈레역까지 기차로 이동을 해야 한다.


'스리랑카 여행'하면 낭만기차여행이 유명하다. 이번이 스리랑카에서 두 번째 기차여행이다. 첫 번째 기차여행은 캔디역에서 누와라엘리야로 향하는 거였다. 인도기차보다도 더 힘들어서 낭만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기차여행에서는 나름 낭만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현지인처럼 문에 앉아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낭만 기차여행은 외국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듯했다. 젊은 커플들이 문에 매달려 뽀뽀를 하는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았다.



정말 운 좋게도 보통 현지인들만 앉아있는 이 문에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기차 내부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면 내 옆에 있던 현지인은 발을 절반만 걸쳐 이동했다.



이곳에 앉아있으면 바로 눈앞에서 이렇게 멋진 풍경을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다. 돈주고도 살 수 없는 명당자리라고 생각한다.



위험천만하게 문에 매달려서 가는 외국인 관광객이 있었다. 같이 온 다른 친구는 내가 있는 문쪽에서 저렇게 매달려 가면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볼 때마다 불안 불안했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이런 경험을 해보자 하는 도전정신(?)이 있어 무서워하면서도 계속 문에 앉아서 갔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서 자리가 좁다 싶으면 있는 힘껏 엉덩이를 뒤로 밀어서 나름 안전을 확보했다.


계속해서 불안하게 매달려가는 친구들이 익숙해져 갈 때쯤 사고가 발생했다. 목적지인 하푸탈레역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역에서 기차가 출발하고 1-2분 정도 되었을까? 갑자기 철퍼덕하는 소리가 오른쪽 귀에 들렸다. 그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사람이 기차에 깔리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기차는 멈췄고 내 눈앞에서 일행 친구와 현지인 몇 명이 뛰어갔다. 나는 오른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바로 기차 안쪽으로 들어가 와노보노를 찾았다. 심장이 계속 쿵쾅쿵쾅 뛰었다. 너무 불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는 다시 출발했다. 기차 내부의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나처럼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보이는 사람, 무표정으로 바깥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여행을 즐기는 사람. 같은 상황인데 사람마다 반응이 다른 게 신기했다. 특히 불안에 떨고 있는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금방 여행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하푸탈레역까지 가는 길 내내 나는 불안해하고 있었고 와노보노는 계속해서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하지만 내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지인도 아니고 아주 잠깐 인사 정도 나눈 사이일 뿐인데 나는 뭐가 그렇게 불안했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죽음, 자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으면서 막상 눈앞에서 사람이 큰 사고가 나거나 죽는 것에 대해 나는 왜 이리도 불안해하는 것일까? 사실은 죽음에 대해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일까?



하푸탈레 역에 도착하니 사고가 났던 친구가 들것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의식도 있고 육안상으로는 크게 다쳐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되어 있는 구급차에 실려가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불안했던 내 마음이 진정되었다.


내가 불안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철퍼덕 소리가 났을 때 내 상상 속에 저 친구는 기차에 깔려 크게 다친 모습이었다. 사실 이건 내 상상이지 실제는 아니다. 실제로 이 친구가 얼마나 다쳤는지 몰랐다. 모르니까 더 불안한 것이다. 다행히 크게 다친 모습은 아니고 바로 조치가 이루어진 모습을 직접 보고서야 진정이 되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국에서도 한 적이 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속에 내가 있었다. 엄청난 인파에 앞으로 한 발짝 나가기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엄청난 인파 속으로 향하기 전 길목에는 비어있는 구급차가 있었다.


이 꽉 막힌 상황이 지속되자 불안함이 몰려왔다. 이 앞에 도대체 무슨 상황이기에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거지? 싸움이 난 건가? 무슨 사고가 난 건가? 알 수 없는 상상만 할 뿐이다. 뒤에서 사람들이 더욱 밀려오니 답답해서 더욱 불안함은 커졌다. 앞에 사람이 핸드폰을 보는데 얼핏 심폐소생술을 하는 모습을 봤다. 내 불안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도저히 앞으로도 뒤로도 가기 힘든 상황에 답답했던 나는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힘겹게 겨우 그 속을 빠져나왔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어간 가게에서 사이렌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 이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었을 때 유명인들의 자살소식을 접했을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고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끔찍했다.




인간이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알 수 없음'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 어떤 삶을 살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본인이 어느 정도 방향을 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는 선택할 수 없다. 아 물론 '자살'이라는 방법을 제외하고.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다는 불안함 때문에 나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을까? 내가 원하는 자살 방법을 브런치에 쓴 적이 있다. 그 방법은 정말 내 옆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때 선택할 것 같다. 만약 사람으로 사람과 따뜻한 교류를 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죽음은 달라진다. 가장 나와 인간적인 교류를 많이 한 사람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 죽고 싶다. 가능하다면 우주여행을 하며 내가 태어나 살았던 지구를 한번 직접 보고 고통 없이 삶을 마감하고 싶다.


죽음은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엄청난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다'는 것 덕분에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본인의 인생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다면 아마 맨 정신으로 살기 힘들지 않을까? 알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다행인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인생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살아볼 희망을 느끼기도 한다. 참 아이러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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