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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Sep 07. 2022

하얀새가

중년새가 된 이야기


 엄마! 어떡해!! 렌즈를 떨어뜨렸어!!

 

 아침 7시, 나를 부르는 다급한 아이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12살인 딸은 10살부터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드림렌즈를 끼기 시작했다. 2년 동안은 렌즈의 모든 것을 내가 관리했다. 밤에 렌즈를 눈에 살포시 얹는 일부터 아침에 일어나 렌즈를 빼고 세척하여 보관하는 일까지 모두.

  그러나 몇 개월 전부터는 아이가 스스로 렌즈의 착용부터 관리까지 모두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렌즈를 빼 달라는 아이의 부름에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속으로는 렌즈 빼주고 바로 다시 잘 거야라고 백만번 되뇌면서- 렌즈를 빼고 세척하는 일 같은 건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졸업.렌즈 도비 이즈 프리!


 그러나 어른의 손보다 야무지지 못한 아이의 손에서 렌즈는 곧잘 도망을 가곤 했다. 이른 아침에 들려오는 엄마! 렌즈!!! 소리는 공포다.

 왜냐하면 렌즈 한쪽에 40만 원이고, 이걸 다시 맞추려면 일주일 이상이 걸리며 이번 주에는 추석까지 껴있고, 그동안 아이는 렌즈를 끼지 못해 시력이 떨어질 것이며...


 그래도 아이 혼자 렌즈를 끼고 빼고 관리하는데 어디인가. 호흡을 가다듬고 올라오던 불안과 짜증을 가라앉히며 아이에게 물었다.


 어디서 어떻게 떨어뜨렸는데?


 렌즈를 빼고 세척한 다음에 통에 넣으려다가 미끄러져서 떨어졌어.


  우선 아이의 몸과 옷을 확인해본다. 렌즈를 오랫동안 착용해온 경험상, 렌즈는 절대로 멀리 떨어지지 않음을 알기에 먼저 아이를 살피고 아이의 발밑을 꼼꼼히 살핀다. 그 주변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고 아이에게 조심조심 화장실에서 나오라고 한 후에 이번에는 내가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기 위해 화장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세면대 아래, 메트 , 수납장 아래, 변기 주변 바닥까지 샅샅이 살핀다. 살피다 보니 바닥이 머리카락과 먼지로 지저분해서 물티슈를 가져와서 구석구석 닦아내며 다시 살펴본다. 보고 또 봐도 렌즈는 없다.

 핸드폰 라이트를 가져와서 수납장 아래 구석까지 들여다본다. 렌즈는 없고 지저분한 먼지는 있다. 본 김에 그 아래 먼지도 닦아낸다. 야금야금 청소해둬야 대청소를 면할 수 있다. 게으른 주부는 곧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머리를 굴려본다.


그나마, 몇 달 전에 새로 맞춘 왼쪽 렌즈가 아닌 게 어디야. 오른쪽은 어차피 맞출 때가 되었으니까.. 다행이지. 그냥 포기하고 새로 맞추자.


 배가 고픈 우리 집 막내가(둘째 고양이) 화장실에 주저앉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자기도 옆에 누워버리고, 부엌에선 빨리 아침밥을 달라고 자기 늦었다고 초조해하는 딸의 소리가 들려온다.

 남편 출근하기 전에 커피도 내려줘야 하는데.. 찾지 못한 렌즈는 여기 어딘가에 있고, 나는 할 것이 너무 많아 바닥에 더 찰싹 붙어버린다.


 바닥에 앉아 하얀 새를 떠올렸다.



-

하루는 이렇듯 쉽게 흘러가버린다.

목적 없이. 이유 없이. 어떠한 소망도 없이

하루가 쉽게 흘러가는 것처럼

내 마음도 쉬이 흘러가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느 날 나이가 들어

하얀 새가 되고 싶다.


누군가의 시에 나오던 하얀새.


살아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었노라고 우는 하얀새.


그 아이가 떠나가면서

삶의 의욕도 열정도 믿음도 다 가져갔지만.

(너를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내일 눈을 뜨면

100세 할머니가 되어.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노래하는 할미새가

되고 싶어라.


2009.10.16


-


 눈을 뜨면 100세가 되어 있기를.

삶을 관망하거나 소홀히 해도 충분히 용서받을 나이가 되기를. 나의 하루하루 한 살 한 살을 살아내지 않고도 살아지기를 바라던 29살의 나는


창가가 아닌 화장실 바닥에 앉아

드문드문 흰머리가 자리 잡은 머리를

이리저리 기민하게 돌려가며

아기새를 위한 먹이.. 아니 렌즈를.

잃어버린 렌즈를 찾아

렌즈 렌즈 어디갔노.노래하는 중년새가 되었다.


 -


엄마 렌즈 찾았어?


물어보며 화장실 문을 여는 아이에게서 뭔가

반짝 바닥으로 떨어진다.

렌즈다!

 처음부터 아이의 몸 어딘가에 붙어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아이의 몸을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봤으면 바닥을 살피는 수고를 덜 수 있었겠지만,

사실 바닥을 한참 들여다보는 일이 오늘 아침의 나에게 필요했다. 그 생활의 흔적으로 가득한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이.


  머리카락과 고양이 털과 일회용 인공눈물의 꼭지들을 들여다보면서,

 살아서 이런저런 일도 있었네-라고 무심하게 우는 하얀새가 아니라, 당장 이런저런 일이 있네!! 라고 패닉하는 중년새가 된 것에 대하여 좀 써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때는 불행했는데 보세요 지금은 행복합니다. 그러니 당신도 힘내세요 -같은 메시지 따위는 없습니다. 혹시 읽는 이도, 나도 , 그런 결론을 내려버릴까 봐 미리 냅다 선언(?)해 놓고 시작하려고요.


 그리고 하나 더.

비장해지지 않기. 포장하지 않기.

애써 무미건조해지지 않기. 어쨋거나 렌즈의 실종에 패닉할수 있는 것은 축복받은 삶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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