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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Oct 30. 2020

사라즈문의 시작

2. 잠 못 드는 밤들



  

 

  나는 엄마라는 역할이 좋다-특히 지금은.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중요하다. '절대로 결혼 같은 거 안 하고 혼자 자유롭게 살 거야 '라고 다짐했던 내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절대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해놓고 이런 말을 하다니, 사람 일이란 그래서 황당하고 재미있다. 까칠하고 예민하고 거리두기의 여왕인 내가, 엄마라는 역할을 이렇게나 좋아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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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엔 엄마라는 역할이 온통 '희생'을 강요당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었다. 초등학생이 "왜 사람들은 어릴 때는 열심히 공부만 해야 하고, 어른이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언제 놀고 언제 쉬는 거지? 언제 그냥 나로 사는 거야?"이런 생각을 잘도 했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어른들은 다 그랬다. 현재에 머물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존재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미래에 살거나 과거에 살고 있었다. 어릴 적을 회상하거나 내일을 걱정하거나.

  하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내가 엄마 아빠의 현재였음을 깨닫는다. 내가 그들의 '현재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현재가 너무 강렬해서 , 그들에게 남은 것은 회상 또는 걱정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특히 아가인 아이는, 부모가 현재에 존재하도록 당당하게 요구하는 존재이다. 자기를 봐달라고 울고, 당장 밥을 달라고 울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운다. 어제를 되돌아볼 시간도 없고, 내일을 걱정할 시간도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웃고, 단순한 까꿍 놀이에도 세상 즐겁게 웃어준다. 울고 웃고 옹알옹알거리고. 그러한 아이를 쫓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런데 그 기분이 나는 좋았다. 하루하루를 진하게 집중하고 시원하게 소비했다.

  그러나 그 소비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온통 아가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내 시간에 목이 말랐다. 현재에 집중하느라, 미래를 소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영원히 그럴 것 같았기에 때로는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다. 신체적으로 힘든 것은 그에 비해면 정말 작은 문제였다. 육아가 고난이도인 것은 내 시간을 온전히 다 내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 시간. 시간! 시간이 이토록 귀한 것이었구나 깨달으라고 아이가 내게 주어졌나 싶었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도 '시간'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이는 나라는 사람도 존재할 수 없었다.

 

 어린 아기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란 다 이렇듯 비슷할 것이다. 너무 행복하고 좋은데, 너무 피곤하고 힘들기도 한 것.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좋은데 때로는 과거와 미래에 마음을 나눠주고 싶어 지는 것. 지금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다 싶다가도, 지금이 영원히 지속되면 어쩌지 걱정이 되는 것. 좋아 죽겠다가도 힘들어서 죽겠는 것. 아이가 주는 무한 사랑에 자유를 얻은 듯, 또는 자유를 빼앗긴 듯-감동과 좌절의 극단을 오가는 것.


 특히, 남들과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좌절감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미혼인 친구의 자유가 부러웠고, 길에 지나가는 회사원들의 소속감이 부러웠다. 남들은 다 어디론가 가는 것 같은데 나만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가끔씩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이 기억하는 나와 지금의 나가 너무 달라서 현기증이 났다. 나는 원래 까다롭고, 똑똑하고, 문학적이고도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아이 이유식은 언제 먹이나 기저귀도 사놔야지, 낮잠은 몇 시에 재워야 하나, 내일은 또 어떤 이유식을 만들어야 하지? '같은 생각밖에 못하는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를 새롭게 찾아가고 구축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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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미혼인 친구가, 또는 출산을 앞둔 친구가 '아이 낳는 거 힘들어?'라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출산하는 건 아이를 키우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사실이다. 출산은 몸이 부서질 듯 아파도 '끝'이 보이는 과정이기에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육아의 끝이란.. 대체 어디란 말인가. 끝이 있긴 하나.

  그렇기에 아기가 잠이 들어도- 다른 엄마들도 다 그렇듯이- 나는 잘 수가 없었다. 육아의 끝을 찾을 수 없으니 그 안에서 내 시간이라도 챙기자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이가 잠든 밤이면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말짱해졌다. 그 시간들을 쪼개어서 책을 읽거나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의 옷, 모자, 양말, 머리띠, 인형을 만들고, 생활비를 아껴서 비싸고 좋은 실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실을 검색하다가 영어로 된 도안을 발견하고 (당시에는 한글로 된 뜨개 도안이 다양하지 않았다) 뜨개 기호들을 찾아가며 도안을 한글로 옮기고, 그러다가 새로운 패턴을 찾아내고 다시 또 실을 검색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클로 빠져들기도 했다.


밤마다 아이를 위한 것들을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기 잘 때 엄마도 자야 하는 거라고, 그래야 버틸 체력이 생기는 거라고 조언을 하곤 했지만, 나는 오히려 잠을 아껴서 뭐라도 만들어야 살 것 같았다. 체력이 넘쳐도 정신이 가난하면 육아는 금방 불행한 것으로 돌변하곤 했기 때문에, 체력을 팔아서라도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내게는 창작행위였다. 뭐라도 좋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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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즈문의 시작은 언제인가. 2011년 아이의 방을 꾸미면서 만든 '무지개 비 모빌'이 시작인 걸까. 또는 2012년 블로그로 모빌 판매를 시작하면서부터일까. 아니면 2013년 '사라즈문'이라는 브랜드명을 확정하면서부터일까. 아니면 2014년 정식으로 '사라즈문'이라는 브랜드를 등록한 것이 시작일까.

 '사라즈문의 시작'이라는 글을 쓰기 위해 예전 기록들을 찾아보고, 일기들을 다시 읽어보다가 그 잠 못 드는 밤들이 떠올랐다. 그 밤들부터다. 그 날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엄마라는 역할을 맡게 된 나라는 사람을 다시 정의 내리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느라 마음도 바쁘고, 손도 바쁘던 그날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절박함이 없었다면 시작되지도 않았을 그 날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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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때도 지금도, 엄마라는 역할이 정말 좋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누구도 이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나 큰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엄마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아이가 엄마에게 주는 사랑이다. (물론, 유통기한이 있는 사랑입니다만)

무엇보다, 아이안에서 '어린 나'를 발견할 때마다, 우주의 신비를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그걸로 부족하다면,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 걸까. 그러한 자책과 의문이 들 때마다,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내 삶은 나의 것. 오로지 하나뿐인 것.'

 내가 엄마라는 역할로만 만족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에게 굳이 나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뻔뻔하고 당당해져야 한다. 내 시간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하고, 나의 것은 내가 챙겨야 한다. 손에 꽉 쥐고 놓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시작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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