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족들에 바치는 글
드디어 왔다.
나의 드림 타자기-올리베티 발렌타인 타이프라이터 (Olivetti Valentine typewriter)
한동안 나의 본캐(핸드 메이더&자영업자)에 충실하느라 글을 쓸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잠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였으니. 이 시국에 이렇게 나를 찾는 이가 많다는 것에 감사한 한편으로 몸은 점점 지쳐갔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흐려지고 만다. 그럴 때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의 레드 발렌타인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의 엣지가 전혀 무뎌지지 않고 뾰족하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 뾰족함은 상쾌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 같은 신선함과 함께였다. 이 바쁜 날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나면 꼭 나의 레드 발렌타인 대해 글을 써야지-하는 마음이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누군가의 아름다운 시각과 정신이 담긴 물건은, 이렇게나 사람의 마음을 각성시켜주고 시각을 환기시켜주고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하는구나 - 이 감탄과 깨달음에 대해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미술을 전공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나는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들(가구, 조명 등)에 상식 수준의 지식은 있었으나 큰 애정은 없는 편이었다. 디자인사를 공부하긴 했으니 그 역사적인 흐름과, 웬만한 디자이너들의 이름과 유명한 가구나 조명의 이름 정도는 알았으나 그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은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내가 정말 부자가 되면- 한마디로 그 고가의 제품들에 쓸 돈이 넉넉해지면-그때엔 관심도 생기고 애정도 생기겠지 생각했다. 굳이, 내 소비 순번의 상위에 위치하지 않은 것들을 무리하면서 까지 추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에 무리한 지출을 하는 것은 보여주기 식 허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랬는데, 세상에- 나의 레드 발렌타인 타자기가 그러한 나의 생각을 바꿔 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실 유명 디자이너의 아트피스에 가까운 제품을 가지고자 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욕구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마저도 '어느 디자이너의 어떤 제품'을 꼭 가지고 싶다는 식의 순서가 아니었고, 내가 어떤 타자기에 반했는데 알고 보니 어느 디자이너의 유명한 작업이었다 에 더 가까운 우연 같은 욕심이었다.
이 아름다운 레드 타자기가 대체 무엇이길래 , 누가 만든 것이길래 이토록 내 마음에 강렬한 소유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내 마음을 이해해 보고자 이 타자기에 대해 서치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찾은 책들에 나온 대목과, 위키피디아 등을 참고하여 알아낸 대략의 간단한 정보는 이러하다.
올리베티 발렌타인 타아프라이터 (Olivetti Valentine Typewriter)는, 전자분야 기술자인 카밀로 올리베티 (Camillo Olivetti)가 자신의 이름을 따 세운 이탈리아 최초의 타자기 제조회사 올리베티에서 출시된 타자기이다. 1969년 올리베티 사로부터 디자인을 의뢰받은 에토레 소트사스 (Ettore Sottsass)와 페리 킹 (Perry A. King)은 "Anti-Machine machine"을 개념으로 사무실을 제외하고 어디서나 어울리는 타자기를 만들고자 하였고 그렇게 소재와 디자인적인 면에서 고전 타자기와는 확연히 다른 올리베티 발렌타인 타자기가 탄생하였다.
이전의 철제 소재의 무거운 타자기와는 달리 ABS 플라스틱을 이용하여 가벼운 바디를 만들었고, 여닫는 가방 형태가 아닌 서랍처럼 삽입하는 형태의 타자기 커버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특별히 기능적으로 이전의 타자기와 다른 것은 없었지만,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인해 사람들이 타자기를 보는 시각을 바꿔준 , 타자기의 역사에서 화룡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아쉽게도, 이후에 등장하는 타자기들은 그야말로 사무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물건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그렇기에 올리베티 발렌타인 타자기는 수동 타자기 역사의 마지막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 디자인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뉴욕 현대 미술관 (MOMA)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에토르 사트소스는 발렌타인 타자기로 인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해(1969년) 델타 디 오르 상을 수상하였다.
발렌타인 이라는 이름은 발렌타인 데이를 기념해서 출시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타자기는 레드뿐만 아니라 화이트로도 제작이 되었으나 그 이름으로 보나 디자인적인 조화 로보나 레드 색상이 단연 돋보인다.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그 독보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현재도 많은 타자기 수집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터넷 검색창에 '에토레 소트사스'를 검색하면 'GD 전신 거울'이 연관어로 뜬다는 것이다. 그는 명백한 스타 디자이너였으나, 우리나라 대중에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인지, 지드래곤의 SNS에 올라온 에토르 소트사스의 특이한 물결무늬 조명 거울이 화재가 되면서 지금에 와서야 (대중에겐) 유명해진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 디자이너인 그는, 사무기기 제조업체 올리베티에 입사한 후부터 승승장구 하기 시작했다. 그가 디자인한 올리베티 발렌타인 타자기 덕분에 올리베티의 전성시대가 열렸고, 1981년에는 유명 디자니어와 신진 디자이너들이 협업해 설립한 디자인 그룹' 멤피스'의 창립멤버로 참여하며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의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대략 "기계적, 기능적 디자인에서 탈피한 감각적인 디자인을 추구하고, 사물과 사용자 간의 감각적인 관계에 중점을 둔, 실용성보다는 예술성과 위트를 더 중시한 작업을 한, 포스트 모더니즘 디자인의 시초를 다진, 디자인계의 피카소. "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그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그의 작업들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시각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눈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달콤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가 평생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진 화두였던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한 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위트, 사족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감각, 창의성'인 것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래서도 안되고 그렇기에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다.
실용성을 벗어난 것들, 그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이 없는 요소들, 효율성의 우선순위에서 늘 밀려나고 마는 사족들, 하지만 친해지면 그 무엇보다 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는 삶의 에센스에 가장 가까운 것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화가, 음악으로 표현하면 음악가, 글로 표현하면 작가, 디자인으로 표현하면 디자이너인 것이다. 그 표현 방법이 기발하거나 아름답거나 명확하고 명석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화자의(여기에선 디자이너) 이야기에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단순히 보기에만 예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를 이뤄내는 작품들을 우리는 'classic(고전)'이라고 부른다.
(나는 디자인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자 쓰는 글이 아니므로, 여기에는 더 이상의 설명- 그의 디자인사적인 의미 등 과 같은- 을 생략하려고 한다. 하지만 한 번쯤은 '에토레 소트사스'를 검색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설명으로 듣거나 읽는 것보다, 그의 작업들을 보는 것이 훨씬 와 닿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훗날 노년에도 그렇게나 젊고 멋진 작업들을 이어갔다는 사실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꿈이 있는 한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면 '증인'으로 채택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마흔의 경계에서,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올드해지는 것뿐인가'의 두려움에 종종 압도되는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 만으로 용기가 생길 것이다. 그는 60세가 넘는 나이에 가장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이너로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왜 이토록 나의 레드 발렌타인이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일까, 왜 이토록 신선한 각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에토레 소트사스에 대해 알아보고, 그의 다른 작업들을 찾아보면서 상당 부분 많이 해소가 되었다. 사람의 감정과 아름다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 정확한 답을 찾았다고는 말하기 힘들겠지만, 모호하고 수많은 요소중 몇 가지를 알아보았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자기는 타자만 잘 쳐지면 된다.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 의자는 튼튼하고 편하기만 하면 되고, 책상, 책장, 조명, 등 모든 것들은 자기 본연의 기능만 문제없이 수행하면 된다. 사람은 의, 식, 주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굳이 책을 읽거나, 아름다운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쓸데없는 유머로 가득한 대화를 하며 낄낄 웃거나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굳이 그 사족들에 마음을 쓰고, 시간을 쓰기를 선택하는 것. 아름답기를 선택하고 웃기를 선택하는 것. 나는 레드 밸런타인 타자기를 보며, 그 '의지'에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기를 굳이 이렇게 아름답고 재치 넘치게 만들고자 한 에토레 소트사스와 올리베티 사의 의지. 이런 타자기를 만들기 위해, 고민을 하고 많은 돈과 노력을 들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난다. 내가 하는 일들도 결코 가치 없는 일들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이 감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내가 이것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나는 타자기, 그것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타자기를 의지를 가지고 소유해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몇 달을 서치를 하고 알아보고, 드디어 대신 구해줄 업체를 찾아 의뢰를 하고, 두 달 정도의 기다림 속에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 그렇게 힘들게 내 품으로 들어왔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삶의 효용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것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가구나 아트피스를, 전시장에 가거나 인테리어 잡지나 책을 통해 관람자의 입장으로 보기만 하는 것과, 금전적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적극적으로 소유하는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이토록 다르다는 것을 이번 경험을 통해 배웠다. 능동적이어야 한다.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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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왜 하필 타자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오타 수정도 안되고 불편하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쓰임으로 보자면 '무용'에 가까운데!
그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무용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은 순수하다는 것을. 그 순수한 염원을 이루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에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 의지를 밀어붙이는 용기는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선물이라는 것을.
내가 타자기를 구하는 과정도-남들 눈에 쓸모없어 보인다고 해도, 너에게 의미가 있다면 충분해. 요즘 시대에 '타자기'같은 것을 추구하는 그런 너의 취향도 인정해-토닥토닥 스스로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네게 되는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 제안을 하나 해보고 싶다. '필요'해서 사고 싶은 것들 또는 사야 하는 것들을 제외하고, 분명히 '필요'의 영역은 아닌데 소유하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무용한 것을 찾아낸다. 그것에 대해 정보를 찾아보고 그것을 왜 좋아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본다. 그 다음에, 가능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소유하려고 노력해보는 것이다. 결국에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거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즐거움을 스스로 챙기는 법이라도 배우게 되지 않을까?아니면 삶의 아름다운 사족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도 얻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