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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Sep 03. 2021

고양이는 내 운명

사소한 기억들의 총체




 가끔 스틸 사진처럼 어린 시절, 어떤 순간의 느낌과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앞뒤의 사건이나 맥락 없이, 그 순간만. 며칠 전에는 불현듯 늦오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살던 집 뒷마당의 풍경이다. 나는 8-9살 정도 되었을 것이고 엄마는 지금이 나보다 젊은 모습이다. 언니는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는지 초점이 맞지 않은 것처럼 흐릿하게 떠오른다. 엄마, 나 , 흐릿한 언니 이렇게 셋이서 그 노란 햇살 아래 함께 있었다.

 우리가 모여 앉아있던, 어설픈 네모난 야외 테이블은 누르면 갸우뚱 한쪽으로 기울면서 삐걱삐걱 소리를 냈고 , 그럴 때마다 그 테이블 위에 놓인 색연필들이 또르르 굴러다녔다. 색연필 종이 책 같은 것이 질서 없이 놓여있는 책상 위로 늦여름 햇살이 입혀지자 모든 것이 오렌지색이 되었다.

 그때의 우린 이런 걸 했었지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고, 늦여름의 한풀 꺾인 열기와 더불어 '아 엄마가 기분이 좋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특별한 일은 없었고, 웃자란 잔디의 까실한 촉감을 발바닥으로 쓰다듬었고, 우리는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대체 이런 기억들은 어떻게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일까, 아무런 기록도 사진도 맥락도 없는 기억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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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날, 특별한 경험을 한 맥락 속에 존재하는 기억은 다르다. 그런 기억들은 보통 나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가령- 기억 속 첫 생일파티, 어디론가 놀러 갔던 기억, 할머니의 장례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던날 - 같은 경험들. 이런 경험들은 보통 '공유자'도 있고 '사진'으로도 남을 확률이 높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기억과, 공유자의 기억과 기념사진 같은 것이 뒤섞여서 보편성을 획득하면 이미 그 기억은 나의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잘 지워지고 요동치는, 나의 불안정한 내부에서 생존해야 하는 기억이 아닌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벽에 붙어있는 가족사진이나, 졸업장, 상장, 같은 것들처럼 변하지 않고 단단한 외부의 (또는 물질의) 세계에 속한 채로 느긋하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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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특별한 날들의 기억들이 떠오르거나, 맥락 속에서 떠올려지는 것은 하나도 당황스럽거나 놀랍지 않다. 그런데 엄마가 기분이 좋았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노란 햇살과 색연필의 기억 같은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일까. 나의 이 과부하되고 엉망진창인 머릿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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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딧불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던 순간의 기분, 반딧불이에게서 나던 풀냄새, 뒷마당으로 향하던 문이 내던 특유의 딸깍 거리는 소리, 교회의 높고 넓은 공간을 채우던 차갑고 낯선 공기, 그 안에서 빛나던 스테인글라스의 빨간색 ,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누워 차를 오래 타는 것은 너무 지겹다고 생각하며 호호 입김을 불어 창문에 그렸던 그림- 이런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때의 기분이 함께 떠오른다. 풀냄새가 좋았고, 딸깍 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설레었고, 차가운 공기가 무서웠고, 손으로 꾸욱 눌러 그린 그림이 나의 심심함을 달래줘서 고마웠다.

 그러고 보면 기억이라는 것은 감정에 붙어서 살아남는 것 같다. 특히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는, 그 어떤 맥락 속에도 살아남을 수 없는 기억일수록 그렇다. 또는 반대로 감정으로 떠올려지는 기억들만 살아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기분이 좋았고 나도 기분이 좋았다 -같은 감정에 붙은 장면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런 기억들은 연약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영영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지. 얼마나 개인적이고 사적인지. 그런데 그 기억들을 건져내는 필터의 형태가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특별한 날의 경험과 기억보다, 이렇듯 사소하게 살아남은 기억들의 총체가 결국엔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고,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 두 고양이들 덕분에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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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어떻게 고양이를 키우게 됐어요? 같은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때마다 막연히 '그냥 어릴 때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어요'라고 대답하는데,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늘 고양이가 좋았다. 왜 좋은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좋았다. 고양이의 도도함도 좋았고, 아름다운 자태도 좋았고, 나긋나긋함도 좋았다. 고양이의 나긋함을 생각하다가 문득 내 다리를 스쳐 지나가던 부드러운 촉감이 떠올랐다.

 나의 머리에서는 샴푸 향이 났고 기분 좋은 초저녁 바람에 뒷마당의 잔디가 촘촘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때 뒷마당 구석 덤불이 흔들렸고 '고양이다!'라고 생각한 순간, 뭔가가 부드럽게 나의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7살 때였다. 그 검정고양이는 가볍고 다정하게 내 다리에 몸을 비비고 사라졌다. 아마도 그게 나의 첫 고양이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를 바라보던 노란 눈이 신비로웠다.

그 신비로움에 부드러움의 촉감, 나긋함이 더해져서, 아마 그때 두둥!- 고양이 두 마리를 모시고 살 - 나의 운명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내 안에 '고양이의 씨앗'이 그때 심어졌으니, 그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며 그러므로 나는 거스를 수 없었고 그렇게 고양이가 한 마리 두 마리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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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거실에 누워있는 나의 고양이들을 바라보다가,  사소한 기억이 이룬 쾌거를 목격하고 있는 기분에 나의 삶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도 느껴졌고, '운명이란 사소한 기억들이 심은 씨앗들이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는 비장한 생각도 했다. 운명이라는 말이 좀 거창한가 하여 '취향'이라는 말로 바꿔본다. 나의 내부에만 살아남은 그 기억과 감정들이 나의 취향을 결정하고, 결국 사람이란 취향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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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취향이 뚜렷한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사소한 기억들의 총체 동지를 만난 것 같아서. 나와는 정반대의 취향이어도 좋으니,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기는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 봐도 멋지다. 그런 사람은 하루에도  번씩 사소한 기억들이 퐁퐁 떠오르기도 하고 톡톡 터지기도 하고 그러겠지. 그래서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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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지금 그 사소한 기억들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기억들을 건져 올릴 필터가 튼튼하게 만들어지기를 바라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물론 내가 너무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 쓸데없이 너무 비장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그래 이건 너의 것이니 네가 알아서-'라고 물러서면서. 그러나 속으로는 '부디 사소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풍부하게 축척되길 '기도하면서.


 그 옆에서 나는 부지런히 나의 운명- 고양이들을 돌볼 것이다. 밥 주고 화장실 치우고 청소하고 병원에 데려가고 양치를 시키고 발톱을 깎고 털을 빗겨주고 놀아주고 사랑해주면서. 이 모든 것이 그 나긋한 기억 덕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또 이 커다란 우주에서 이 쪼그만 지구, 그것도 한국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사랑하고 티격태격 살아가는 모든 일상에 운명론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의미 부여는 자기 합리화와 맞닿아있기에 조심하려고 하지만, 매일의 일상에 이 정도의 의미부여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특히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 일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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