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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Aug 23. 2021

불안과 우울에도 얼굴이 있다면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더 정확하게는 머리가 복잡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거나, 아! 일어나야지! 같은 단순한 명령어만 들릴 때가  좋은 아침, 좋은 하루의 징조라면 반대로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오늘처럼 답답한 웅성거림만 들리는 것은 분명 좋지 못한 신호이다.

 나는 여러모로 빈틈도 많고 느슨하면서 유독 감정을 길어 올리는 망은 촘촘한 사람이다. 남들이 잘 감지하지 못하는 아름답고 동그란 감정들을 잘 감지하는 만큼, 뾰족하고 불필요한 부산물도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는다. 그런 작고 못난 부산물들이 뿌옇게 나의 감정의 망을, 나의 명민한 레이더를 덮어버리면 오늘 아침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말하게 되는 일이.


 얼굴이 없는 기분 나쁜 찌꺼기들이, 웅성웅성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소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의 불편함과 공포는 그 감정들의 익명성 때문에 증폭된다.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 마음에 들어왔으므로 얼굴과 이름이 없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듣게 될까 봐 나의 귀는 반쯤 닫혀있는 상태이므로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못하는 척한다). 반은 나라는 사람의 타고난 성향 탓이고 반은 무의식을 가장한 의식의 탓이므로 결국에는 내 탓이오. 다 내 탓.

 

 -

 

 내 탓이라는 인지로, 죄책감과 자기 연민이라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못난이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쓰기로 했다. 나의 불안과 우울에 이름을 붙이고, 얼굴을 만들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더 정확하게는 리스트로 정리해서, 하나씩 처리해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해서라도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마도 내가 적어본 적어본 리스트 중에 가장 지루하고 우울한 리스트가 될 것이다


 그래도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나를 괴롭히는 그 얼굴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본다.


1. 부족한 엄마라는 죄책감


개학을 앞둔 어제, 수업 준비를 돕는다고 오랜만에 학급 밴드에 들어가 보았다.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가 될 줄은. 방학 숙제로 중간중간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사진을 올리고 설명을 적는 사진첩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다른 아이의 활동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문제(나에게는)였다. 수영장에서 찍은 사진, 승마를 하면서 찍은 사진, 친구들과 놀러 가서 찍은 사진 등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알차게 보낸 모습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두세 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아이와 친한 세명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들 셋이서 놀이 공원에 놀러 간 사진들이었다. 순간 '어라.. 왜 우리 아이만 빼놓고 갔을까?'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물론 그들끼리 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부러 우리 아이만 쏙 빼놓으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서운함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아니.. 누구네 엄마는 나랑 맨날 연락하고 안 친한 것도 아닌데, 어쩌면 나한테만 말을 안 하고 그렇게 세명이 간 걸까' ' 내가 평소에도 누구누구는 마음에 안 들었어. 맨날 자기 필요할 때만 우진이를 찾고..'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커지고 커지다가 결국엔 나의 가장 못난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다.


- 내가 유별난 엄마라서. 다른 엄마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난 엄마라서. 그 피해가 우리 딸에게도 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웃사이더라서 그런 못난 점을 우리 딸이 물려받으면 어쩌지.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사회성이 뛰어나고, 엄마들끼리의 친분도 좋아서 이 친구 저 친구 만나면서 신나게 여름 방학을 보내는데, 우리 딸은 엄마가 예민하고 다른 엄마들과 친하지도 않고 (좋지 못한 의미로)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서 이런저런 곳에 초대도 못 받고 외롭게 보낸 것은 아닌지 - 그야말로 아무 영양가 없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저 웅성거리는 무리에서 가장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물론, 저 자책의 말들 중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거나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것임을 안다. 아이는 나름 즐거운 방학을 보냈다. 새로운 식구로 인해 (둘째 고양이) 매일매일이 즐거웠고, 아이의 친구들도 자주 놀러 왔으며, 무엇보다 나랑 신나게 잘 놀았다. 그걸 알면서도, 저 사진 몇 장에 무너지는 나라는 사람- 정말 나약하다.

 들여다보니, 그저 죄책감이라고는 이름 붙일 수 없겠다. 자각-이라는 부제를 붙여야 할 것 같다. 이런 일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나약함에 대해 새삼 자각하고 회의하고 걱정하게 된다. 그 모두가 똘똘 뭉쳐버렸다. 그야말로 못난 감정들의 집약체가 되어버렸다.


2. 이런저런 해결하지 못한 일들


 나는 바지런하고 계획적인 사람이 못된다. 그러나 반대로 세운 계획대로 일들을 해나갈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잘 통제하지는 못하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만족스러운 사람. 그 간극 때문에 오랫동안 만족과 불만족의 지루한 패턴을 반복해 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뤄지고, 내가 그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에는 만족감이 밀려왔다가, 계획이 틀어지고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불만족에 쉽게 빠져버리는 것이다.

 나를 이토록 불안하게 하는, 해결하지 못한 일들은 대체 무엇일까- 지루한 리스트 속에 또 하나의 미니 리스트를 적어보자면.

 - 밀린 작업과 프로젝트들

 -미루고 있는 연락들

 -크고 작은 금전적인 문제들

 -다이어트


 대부분이 내가 현재 '미루고 있는'일들이다. 미루고 있는 이유는 대체로 내가 '게으른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실적 주의자가 되고 싶다. 특히, 좋지 않은 소식이나 미안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 미루지 않고 해치워 버리고 싶다. 애초에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미룰 연락 따위 없었을 텐데.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 되면 좀 해결이 될까 싶기도 하고.

 맨날 이렇게 미루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금전적인 문제가 생기지만, 그 문제는 나의 소비 습관에도 잘못이 있으니 여러 복합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하자. 어쨌든, 나는 우리 가족 전체로 보면 풍족한 편이나 나 개인으로는 좀 가난한 특수 상황에 빠져있다. 이것은 나의 '자존심'에 의해 커진 측면이 있다. 괜히 자존심만 높아서 돈을 뻔뻔하게 쫓지도 못하고, 그 자존심 때문에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있다. 그래도 돈에 대한 초조함이 게으름을 떨쳐낼 강력한 동기가 되어주기도 하기에 어느 정도는 그것이 주는 강제성에 의지하는 면이 있다고 고백해 봅니다.

 그 외에 늘 나를 언짢게 하는 매일의 다이어트 실패. 요즘엔 꿈도 꾸고 있다. 오랜만에 나를 만난 동창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머 너 왜 이렇게 살이 쪘어?'라고 놀라는 꿈. 괴로워하면서도 먹고 싶다는 의지를 꺾지 못하고 다시 다이어트는 '내일로' 미루고 마는 패턴의 반복이 얼마나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이 정말 정말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1) 그런 사람은 무엇을 해도 건설적으로 잘해나갈 것만 같다. 그렇다면 자꾸만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나 같은 사람은?


 3. 에너지의 부족으로 인한 여유 없음

 

 나는 왜 이리도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일까. 그 부족한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려도 레벨이 현저하게 낮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좋은 일'을 해보겠다는 거만함과 '고양이에 대한 사랑'으로 고양이를 한 마리 더 데려와버렸다! 둘째는, 애니멀 호더 집에서 구조된 고양이에게서 태어난 아가이다. 평소에 늘 동물의 권리에 관심이 많았던 지라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도움이 필요한 고양이를 입양해오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인연이 닿아 정말로 둘째를 데려오게 된 것이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합사'라는 과정을 거쳐야 기존의 고양이와 잘 지낼 수 있는데 그 과정에 이렇게도 내 에너지가 많이 빼앗길 줄은 몰랐다. 내가 챙겨줘야 하는 식구가 하나 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신경이 분산되고 에너지가 적잖이 쓰이는데, 거기에 더해 혼란스러울 첫째의 입장도 배려해야 한다. 그런데 더 큰 복병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둘째를 데려오자고, 오면 자기가 다 돌보겠다고 열정을 불태우던 휴먼 딸의 예상치 못한 '질투'에 있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질투라기보다는, 엄마가 자기에게 쏟는 관심과 애정이 분산된다는 것에 대한 투정이 폭발했다. '엄마와의 시간이 필요해요' '엄마는 고양이들만 신경 쓰고..'같은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들어보세요. 미칩니다. 하지만 아이가 원망스럽지는 않다. 나의 에너지 부족이 원망스러울 뿐.

 나의 그릇은 왜 이렇게도 작은지, 왜 내게는 상황이 극에 달 했을 때 오히려 여유를 찾는 배짱이 없는지. 다른 사람들은 아이도 둘, 셋씩 낳아서 잘만 키우는데, 나는 아이는 하나 고양이가 두 마리면서 왜 이렇게 허우적 대고 있는지.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를 둘 이상 낳아서 잘 키우고 있는 '엄마들이 정말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2)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첫째가 둘째를 너무 무섭게 혼내서 그 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장난감을 흔들어대고 있는데, 딸은 온라인 수업을 하던 중에 '엄마! 가위 좀 가져다줘!!'라고 소리를 쳐서 다급하게 가위를 찾아서 가져다주면서 '다음부터는 네가 수업 전에 미리미리 챙겨놔!' 같은 잔소리를 던져주고 왔다. 내 마음의 뾰족함에 내가 아야! 하고 놀랠 지경이다


 언젠가 본 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작가인 엄마는 마감시간에 쫓기는 와중에도 아이에게 먹일 음식을 다급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때 남편이 아직 아가인 둘째를 안고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난 급한 일이 있어!'라며 요리 중인 아내에게 아기를 떠넘기고 나가버렸다. 불위에 올린 파스타는 끓어 넘치기 일보 직전이고, 아기는 울기 시작하고, 둘째는 배고프다고 징징대고, 마감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기를 안고 둘째와 눈을 맞추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파스 타물은 이미 넘치기 시작했지만, 곧 아가는 울음을 멈췄고 둘째는 엄마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결국에 엄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나는 저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이다. 압박감으로 뾰족해지는 마음을 외부의 도움 없이, 온전히 나의 의지로 동그랗게 갈아내는 일 같은 거, 나는 할 줄 모른다. 나는 아마도 먼저 첫째에게 좀 기다리라고 화를 버럭 냈을 것이며, 둘째에게도 그만 울라고 짜증을 냈을 것이다. 시계를 보면서는 마감시간을 떠올리고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요리하던 손을 놓고 불을 꺼버리고, 그냥 다 굶자고_!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르고, 아기를 두고 나가버린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악담을 퍼부었을 확률도 높다.

  그래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너는 왜 이렇게도 마음이 작은지. 너는 왜 그렇게 여유롭지 못한 지. 왜 너는 그렇게 뾰족한 사람인지. 가장 무서운 것은, 아이에게 나눠줄 마음이 요즘엔 별로 없다는 것이다.


4. 이런저런 서운한 일들.

 

 얼마 전에 시댁에서 식사를 할 일이 있었다. 고기 굽기에 푹 빠진 남편이 이번에도 고기를 굽겠다고 하자 시어머님이 '이번에도 네가 요리를 해서 어쩌니'라고 하셨다. 고기를 구운 후에 이번엔 관자를 굽겠다고 하자 시어머님은 '그것도 네가 한다고? '라고 하셨다. 그 와중에 나는 남편이 어지럽히는 그릇들과 재료들을 치우고, 썰어달라는 재료들을 썰어주고, 식탁을 세팅하고, 음식을 꺼내고, 한시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님이 저런 뉘앙스의 말씀을 두어 번 더 반복하셨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 어머님, 아범은 집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요. 어쩌다가 이렇게 한번 요리하는 건 해도 돼요. 게다가 아범이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뭘'

 참고로, 우리 시부모님과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모두 좋으신 분들이다. 특히 우리 어머님은 저런 얘기를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실 분은 아니다. 내가 며느리로서 특별히 고생하는 것도 없고, 있었다고 해도 그건 다 과거일 뿐이다. 사실 결혼한 지 15년이나 되었으니 지금 와서 문제가 될 일도 없긴 하다. 그런데 유독 남편이 요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꼭 저런 얘기를 하시곤 한다. '네가 다 요리해서 어쩌니' '이번에도 네가 요리하니?' '요리하느라 고생했다'

 남편이 시댁에 갈 때마다 한 요리의 정도와, 내가 시댁 갈 때마다 하는 요리의 정도를 비교하자면, 10:1000000 정도의 비율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요리하느라 고생했다'라던지 '이번에도 네가 요리하니?' 같은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네가 맨날 요리해서 어쩌니'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다시 울컥 화가 나려던 순간에 고맙게도 시누이가 나서 주었다. '엄마, 오빠 집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 여기 올 때마다 요리하는 건 할 수 있지 뭐' 옆에서 듣던 남편도 수긍해주었다. ' 그렇긴 하지. 그리고 고기 굽는 건 제가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시부모님은 남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상하게도  상황이  마음에  달라붙고 말았다. '이번에도 네가 요리해서 어쩌니'  말속에 '네가' ' 와이프가 아닌 네가'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며느리라는 입장이 아직도 얼마나 서글픈지. 며느리가 하는 노동은 여전히 디폴트인 것이다. 비교적 쿨하신 시부모님의 며느리인 나도 이러한데 우리나라의 수많은 다른 며느리들은 오죽할까...  딸이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 여자는 원래 저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될까  두렵기도 하다.

 

5. 기타 등등

 

 그 외에 완치가 되지 않는 염증처럼 내가 취약할 때 얼굴을 들이미는 단골들이 좀 있다. 내가 여태 이룬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한 회의. 좀처럼 아침형 인간이 되거나 부지런하게 지내지 못한다는 자책. 부모님께 좀 더 잘해드려야 하는데 , 나중에 후회할 텐데 같은 초조함.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걸까, 나는 좋은 부모가 맞나, 아니 좋은 사람이 맞는 걸까 에 대한 끝없는 의문. 결코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평생 나와 함께 가야 할 단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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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이렇게 글을 쓰고 싶은 것일까,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자주 해왔다. 기록을 하기 위해서 쓰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쓰고, 공감을 받기 위해서도 쓰며, 잊지 않기 위해서도 쓴다. 하지만 나를 갉아먹는 불안과 우울에 이름을 붙이고 친근해지기 위해서도 쓴다. 절박함을 느끼면서. 고해성사처럼 구구절절하게.  김연수 작가는 소설의 화자를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글로 쓸 수 있는 고통은 견딜만한 것이 된다'. 글로 쓸 수 있는 불안과 우울도 마찬가지 아닐까. 막연했던 불안과 우울에도 얼굴이 있다면, 그렇다면 막연한 공포에 떨 일도 줄어들고 막연한 우울에 빠질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모두가 다 이겨낼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이러한 절박함으로 나는 매번 나의 불안과 우울에 대해서 쓴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읽어보고  '옹졸함' 경악하며 결국 혼자만의 글로 저장해둔다. 물론 그에 대해서  것으로는 무엇이 해결되지 않지만, 적어도  두려움이 나를 압도하는 것은 막을  있다. 해결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해결을 해야 한다. 위에서도 적었듯이, 하나씩 처리해버리기 위해 이렇게 지루하고 우울한 리스트를 쓰는 것이다. 정말로 말끔하게 해결되는 일도 있을 터이고 (2번의 대부분) ,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끊어냄으로써 해결해야 하는 일들도 있을 터이고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있음을 받아드려야 해결이 되는 것들도.

 적어도 이제 무엇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들부터 몰두해 보려고 한다. 밀린 일들 처리하기! 한동안은 내가 이름을 붙인 이 얼굴들을 계속 바라보게 될 터이니, 아이 예뻐라.. 까지는 아니어도, 그래 너도 고생이 많다.. 같은 연민을 좀 부려볼까 한다. 며칠 뒤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이런 모습이랄까.. 엉망진창 무섭고 두려운데 좀 안쓰럽기도 한 나의 불안과 우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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