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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Apr 08. 2021

봄을 만난다는 것

나의 작은 블루베리 화분



올 초, 동네 화원에 들렀다가

블루베리 화분 세 개를 얻어왔다.


 붉은 가지만 앙상하게 뻗어있는 볼품없는 식물이었다. 식물의 동면 상태는 이토록 메마르고 건조한 것이구나- 겨울에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그토록 많이 봐왔으면서도 식물도 동면을 한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집에서 가장 시원한 베란다에 앙상한 화분 세 개를 나란히 두고, 심폐소생술을 시키는 기분으로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고 매일 환기를 시켰다. 그러나 한동안은 그 어떤 생명의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계속 쏟아지고 한파가 계속되다가 느닷없이 기온이 상승하여 올해는 봄이 빨리 찾아오려나 하는 착각에 들 때 즈음


세 개의 화분 중 한 개의 화분에 초록색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야 겨울잠에서 깨어났구나!


 일주일이 지나자 꽃망울처럼 보이는

동그란 것들이 가지 끝마다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 번째 화분이 앞서 달리기 시작하자

그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이번엔 두 번째에도 초록색 기운이 돌고,

꽃망울이 여기저기 맺히기 시작했다.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식물이 깨어나는 모습은, 겨울을 이겨내고 여기저기 초록을 피워내는   자체였다.


 두 개의 화분이 연달아 꽃을 피우고 초록색 잎을

가득 피우는 와중에도 세 번째 화분은 여전히 앙상했다. 화려한 친구들 옆에서, 소심하게 구부정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화분이 괜히  못나보여서  앞에 앉아 네놈의 게으름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잔소리가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일주일 정도 지나자 세 번째 화분에도 꽃망울이 맺히고 초록의 기운이 희미하게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화분들에 비하면 여전히 참으로 앙상했다. 그래서 언제 친구들을 따라잡으려고 나-또래보다 느리고 체구가 왜소한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이 되었다.


 좀 쑥쑥 자라줘야 키우는 재미가 있는 법인데!


 사이 첫 번째와 두 번째 화분에는 꽃이 한가득 폈다. 블루베리 꽃은 은방울꽃처럼 하얗고 청초하게 생겼다. 보라색 열매를 맺기 위해 하얀색 꽃을 피우는 일에는 우주의 신비가 담겨 있다는 거창한 생각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생김새를 관찰했다.



 반짝 따뜻했던 날들이 사라지고 다시 한파가 몰려왔다.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벌써 화분에는 꽃이 펴 버렸으니 문제였다. 블루베리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꽃과 벌의 만남이 꼭 성사되어야 하기 때문인데,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득하여 벌은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 창밖을 바라보고,

여전히 두꺼운 코트를 입고 산책을 하면서도,

혹시 벌이 나타나지 않을까 열심히 둘러보았다.

내가 벌을 이렇게나 기다리게 될 줄이야, 기가 막혀하면서도 눈으로는 부지런히 벌의 흔적을 살폈다.


 그 사이 첫 번째와 두 번째 화분의 꽃들이

하나둘씩 시들시들, 고개를 숙이고 채도를 잃어갔다.


가장 먼저 만개했던 화분은 결국 봄을 만나지 못하고 꽃을 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며칠 뒤, 두 번째 화분도 첫 번째 화분을 따라 꽃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 번째 화분은 꽃망울 몇 개를 더 만들어냈을 뿐, 여전히 느리고 앙상했다.


다른 화분들이 활짝 폈다가 지는 동안에도  아이는 급한  하나 없다.


 끝이 보이지 않던 추운 날들이 서서히 옅어지고

드디어 가벼운 외투를 입고 산책 가능한 날들이 왔다. 산책길에 반갑게도  사이를 오가는 벌을 여러 마리 보았다.


 봄이 되어 벌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벌이 봄을 몰고 온 것처럼- 꽃 사이를 오가는 벌을 보는 순간 별안간 봄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화분을 집 바깥 화단으로 옮기려고 보니 어느새 세 번째 화분에 꽃이 활짝 피어있다.


결국 봄은 왔고, 벌도 왔는데

벌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은 세 번째 화분 밖에 없다.


그 화분을 바깥 화단으로 옮기고 틈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소문이라도 난 것인지, 금세 벌들이 두세 마리씩 몰려왔다.


 올해 , 블루베리 열매는

세 번째 화분에만 맺힐 것이다.


-


그러니 초조해하지 말자.

나이가 마흔이나 되었는데도,

나는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지? 자책하지 말자.

같은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룬 이들을 보며 좌절하지 말자.

그들의 봄은 빨리 왔을 뿐이고,

나의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것뿐이다.


나는 이미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 화분 같다는

못난 생각이 들 때마다 ,

앙상한 모습으로 긴 겨울을 버텨내고,

좋은 때에, 봄을 만나고 벌을 만나서 열매를 맺을

세 번째 블루베리 화분을 생각해야지.


 다른 아이들이 화려하게 초록을 뽐내고 꽃을 피워  때에도 묵묵히 앙상함 안에서 자기의 때를 준비했을  마음을 생각하면 겸허해진다.


나와 당신은 이미 시들어버린 화분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며 꽃망울을 준비하는,

생명과 가능성으로 가득한 단단한 존재.

 

 언젠가 각자의 봄을 만나게  것이다.


-


 ps. 벌을 만나지 못하고 그래서 올해엔 블루베리 열매를 맺지 못하겠지만- 앞서 활짝 피어준 두 개의 화분에게도 감사를. 덕분에 한파 속에서도 봄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배웠지. 블루베리 꽃은 하얗고 귀엽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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