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전쟁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를 바탕으로 하든 순수한 허구이든 결국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어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집중되어 영화가 가진 자체의 매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오늘 리뷰하는 두 영화는 전쟁과 테러를 소재로로 하고 있다. 내가 전쟁영화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두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 두 영화는 전쟁이나 테러에 대한 영화로 규정되지 않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같은 감독의 작품인 두 영화는 전쟁과 테러라는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치는 상황에서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에 대한 영화로 한 번에 리뷰하려 한다.
나는 영화는 궁극적으로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이해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전쟁과 테러라는 극한상황의 상정은 평상시 도덕적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목표를 가지고 목적을 완수하려는 캐릭터의 존재와 구축에 당위성을 제공한다.
제로다크서티에서는 주인공이 절대악으로 표현되는 '목표'를 제거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어떠한 이유에서 건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다. 더욱이 인간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다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함은 언제나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 목표가 '빈 라덴'이면 어떨까? 사람을 죽여 평화와 마음의 위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속 시원히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목적'이 납득이 되고 그 '목표'는 절대악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허트로커에서는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폭발물제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무모하리만큼 폭발물 제거에 몰두해 있다. 모든 다른 동료들은 의무복무기간이 끝나가기만 손꼽아 기다리지만 어쩐 일에서 인지 주인공은 무덤덤하며 오히려 아쉬운 내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의무복무기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주인공은 모든 일에 집중을 못하고 공허한 눈동자를 가지고 살아간다. 종국에는 다시 전쟁터로 돌아온다. 그에게 이미 폭발물제거라는 '목표'만 남았으며 이를 통해 '평화'구축이라는 목적은 영영 잃어버린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두 영화는 같은 감독과 각본가에 의해 완성되었고,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고 본다. 주인공의 성별이 다르고 근무환경 역시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이는 포장이 다를 뿐 그 속의 알맹이는 같다고 본다. 제로다크서티에서의 사살된 목표물을 확인하고 이제 난 무엇을 쫓아야(목표)할까? 목표달성 뒤에 오는 허탈감과 목적을 잃어버린 주인공의 모습과 허트로커에서 이미 목적을 잃어버린 지는 오래며 폭발물 해체의 목표에 갇혀 버린 주인공의 모습은 한 인간의 서로 다른 그림자 같이 느껴진다. 제로다크서티에서는 주인공의 뒷 이야기가 길게 나오지 않지만 확신에 찬 상상으로 단언해 보자면 제2의 빈라덴 제3의 빈라덴을 목표로 삼아 삶을 목적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목표는 이루었지만, 목적을 잃어버린 삶, 그 공허함에 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