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가는 대로 살아보니
지난주 토요일, 강원도 태백의 고원 체육관에서 격투 시합을 했다.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으로 출전한 아마추어 시합이 1년 반을 지나 어느덧 세미프로 7전 째다. 시작할 때는 그리지 못 한 그림이었다. 시합을 거듭할수록 상대는 강해지고 우리 팀의 훈련 강도 또한 높아진다. 수련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져 운동이 갈수록 쉽지 않아 졌다. 단 한 번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러너스 하이를 느끼는 가끔씩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시간을 돌아본다.
돌이켜보면 서른 남짓한 내 삶은 단 한 번도 예상대로 흘러갔던 적이 없다. 큰 그림을 그리길 좋아해 전략경영 식으로 사고하고 계획하지만 내가 설정한 비전은 늘 과녁을 비껴가거나 도달하더라도 기대한 바와 실제가 달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2024년에 격투 시합에 나갈 줄고 몰랐고,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줄은 더욱 몰랐으며, 무엇보다 직업 작곡의 꿈을 접고 케이팝 기획자가 되고자 하는 그림은 더더욱 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난생처음 그려본 인생 계획표 안에는 송승환 선생 같은 문화 기획자가 있었고 그 이전에 취미 삼아 대학가요제에 수상하는 싱어송라이터가 있었다. 아무것도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길까지 걸어온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 어디로 갈지의 기준을 제시해 준 스승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부대에서 인연을 맺은 Sergeant Major Lee였다. 나는 카투사로서 성남에 있는 미 육군 2사단 항공 대대에서 복무했다. 이상하리만치 군생활에서의 도전과 성장이 재밌고 게임 캐릭터가 레벨 업하는 느낌도 들어 군생활동안 여러 이벤트에 도전했었다. 이러한 업적(?)이 눈에 띄었는지 새로 부임한 주임원사의 부탁으로 말년에 그를 보좌해 이곳저곳의 통역을 다녔다. SGM Lee는 부대에 부임하자마자 군 기강을 바로잡겠다고 선언, 새벽 5시에 체육관을 개방시켜 버리고 훈련 빈도와 강도를 높여버린 철의 군인이었다.
어떤 날, 회의 자리로 향하는 길 그의 차 안에서 지난 군 생활에 관해 들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파병, 동료들의 죽음과 저격병으로서 사람을 총으로 쐈을 때의 기분 등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간접 체험했다. 나는 드문 드문 한 영어로 왜 그런 모험을 했는지 물었다. 전역을 며칠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Always Follow your heart. “ 흙먼지와 총성 소리로 얼룩졌을 전사의 대답치곤 꽤나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이유이자 제안이었다. 심장을 따르라… 전역을 앞두고 새 출발을 꿈꾸는 내게 그가 준 선물은 심장이라는 기준이었다. 수많은 인생의 기준 중 왜 심장이었을까? 큰돈, 큰 명예, 큰 힘과 이름이 아니라 왜 심장이었을까?
이후의 인생을 돌이켜보니 깊은 고민의 기로마다 심장을 따라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매 순간 그의 소리를 따라가진 못 했다. 선택에 겁이 나 주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문을 모른 채 심장이 끌리는 선택이 있으면 발걸음을 옮겨 왔던 것 같다. 그래서 고생했고 불안했다. 심장을 따른 결과는 처참했다. 또래 친구들이 입사 4-5년 차 대리가 되어 있을 때 다음 달 빚 상환을 걱정하는 미생이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또래 친구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준희는 돈 빼고 다 가졌다’고 말하겠는가! 심장 박동을 따라가니 돈, 학벌, 심지어 꿈꾸던 직업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도 다 잃었다. 나를 꾸며주던 멋진 옷들을 다 잃었다.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도, 불안과 고뇌가 삶에 들어찼음에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렇게 살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난 물질과 이름을 잃은 만큼 진심 어린 이야기들을 얻었다. 영화음악 작곡을 수련할 때 음악으로 스토리텔링하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심장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솔직하지 못했던 오늘만을 후회할 뿐 심장이 이끄는 곳에 가기 위해 보낸 삽질의 시간은 후회하지 않는다. 설령 도착한 곳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봉우리에 오르는 동안 보람을 느꼈고 어젠 보지 못했던 나무와 곤충도 만났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 말씀대로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보다. 하지만 억지로 철을 심장에 쑤셔 넣어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릴 마음은 없기에 나는 샤일록에게 심장을 내어 주지 않아도 된다. 다행이다. 심장을 지킬 수 있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무릎을 지킬 수 있어서. 할머니 무르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던 시간만큼 아깝지 않은 시간은 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