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서야 적는 조사
류이치 사카모토가 세상을 떠났다. 2023년 3월 28일 밤이었다. 나는 홀로 바다 구경을 마치고 배가 고파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SNS를 잠시 둘러보다가 그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내 깊은 침울에 사로잡혔다.
동시대를 사는 음악인 중 내가 살아 생전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둘 있었다. 필립 글래스와 함께 류이치 사카모토는 그 중 하나였다. 그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그와 처음 만났던 2018년 <async> 앨범 제작 다큐멘터리 속 그는 암 투병 생활을 견디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왕성하게 사운드 실험과 음악 수련을 이어 온 그는 돌연 암에 걸린다. 엄청 많은 약을 쳐다보며 침묵을 지키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똑바로 세우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그는 죽음이란 대주제에 몰입하고 있었다. 죽음은 그가 이제껏 연습했던 어떤 악기나 작법보다 강력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통찰을 적어 내려간 앨범 <async>는 내가 사선에 선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마다 용기를 주던 선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서른 즈음의 내게는 그랬다. 깊은 침묵으로 이루어진 그의 시선이 필요했다. 침묵과 경청 끝에서 그는 내게 ‘느끼는 대로 행동하라’고 명령했다. 잘 느끼기 위해서 걸음을 적절한 때에 멈추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느낌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를 내라고 주문했다. 음악은 소리로 자기를 표현하는 행위다. 모든 프레임과 법을 넘어서는 자신의 직관을 믿고 손과 발로 소리를 옮기는 작업이다. 그의 인생 실험은 내가 직관을 믿으며 나아가도록 추동했다. 이젠 더 이상 선봉에 서서 침묵이란 도화지 위에 깨달음의 획을 긋는 멘토가 사라졌기에 나는 그의 죽음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나와 그 사이에는 산책이 필요했다. 시인 마야 안젤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해지지 않은, 약속된 산책”이었다. 만약 그 산책길을 걸었다면 그는 내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그보다 더 궁금한 점은, 어느 정도의 속도로 걸었을 것인가다. 목적지를 향해 급하게 걸었을까? 주변을 느끼며 천천히 걸었을까? 잠깐 눈을 감았을까? 잠시 멈추어 숲의 고요를 들었을까? 산책길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걸었을 수도 있겠다. 산책은 입이 아닌 발로 하는 것이므로. 말 없이 같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말이 거대한 침묵을 감상할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함께 그의 마지막을 기다렸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그가, 함께 산책길에 오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여 남긴 편지를 오늘 다시 읽어 보았다. 마지막 앨범 <12>의 첫 번째 트랙 ‘20210310’은 중심이 없다. 비어 있는 중심축을 몇 가닥의 소리가 천천히 맴돈다.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 이들은 희미한 발자취를 남기며 어딘가로 향한다.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곡의 숨이 죽는다. 어느덧 귀가 마지막 트랙 ‘20220304‘에 이른다. 몇 번의 종소리가 울림과 여백을 낳는다. 한 옥타브 12음에 억지로 우겨 넣을 수 없는 소리들이 이곳에 있었다. 찰나의 가락은 공중에 흩어진다. 그마저도 희미했던 소리가 쉼표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결국 모든 생명은 잠깐 공기 중에 흩뿌려져 여백 속으로 몸을 누일 운명인가보다.
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글을 조사라고 한다. 나는 그의 조사를 어떻게 쓰고 싶은가? 마야 안젤루의 시 <위대한 나무가 쓰러질 때>의 마지막 연을 읊어 본다.
위대한 영혼이 사라진 후…
(중략)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회복된 우리의 감각이
속삭입니다.
그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다.
우리도 될 수 있다. 되고 더 나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를 마음 속으로 떠나 보낸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나도 있을 수 있다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얻는다. 그가 남긴 여백은 누군가가 음표를 흩뿌릴 도화지다. 내가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되어준 그에게 감사를 전한다. 나 또한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 속에 누군가의 존재 이유로 자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