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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Nov 23. 2023

사라의 집

타운하우스와 친구와 여행하는 법

Reykjavik, Iceland 2017


 시내는 아이슬란드 덕후였다.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로스(sigur ros), 아이슬란드 스웨터 로파페이샤(lopapeysa), 아이슬란드 요거트 스키르(skyr)를 좋아해 왔고, 언젠가는 꼭 사서 입을 것이고, 먹어도 볼 거라며 아이슬란드 덕후 모임에 나가고 그 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아이슬란드어도 체득했다. 평소에 느릿느릿 자신에 속도에만 집중해, 같이 길을 걷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저기 멀리서 풍경을 구경하는, 세상 느긋한 시내에게 저런 열정이 있다는 것을 나는 존경해 왔다. 끊임없이 묵묵한 걸음은 내가 가장 동경하는 종류의 초능력이었다. 그렇게 그는 누가 뭐라든 혼자 천천히 걷는 자였다. 그러다가 완전히 길을 잃는 자이기도 했다. 어쩌다 오른쪽 방향이 맞는 것 같아도, '아니야 내가 방향이 맞을 리가 없어' 하며 왼쪽으로 멀리멀리 여행을 떠나는 엄청난 길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쩐지 항상 자신의 길은 나보다 더 잘 찾는 것 같았다. 건축학과를 5년제를 꽉 채워 졸업하고 자신의 성향과 능력에 더 맞다며 디자인 회사를 버젓이 혼자 차렸다. 이름도 아이슬란드어를 따서 신다(synda:수영)라고 지었다. 맞다. 그는 나의 수영 친구이기도 했는데 심지어 수영도 음미하면서 천천히 해서, 사주에 발이 4개 달린 사람을 똑 닮은 자식, 나로서는 느릿느릿 자유형으로 헤~~엄~~~쳐~~~~ 오는 그가 정말 신기했다.

    "와 난 시내 너랑은 열두 시간 이야기는 너무 재밌게 할 수 있는데 한 시간 같이 걷는 건 못하겠어. 완전 속 터져."

     "야 춥다물 네가 너무 빨리 걷는 거야. 뭐가 그리 급해서 달리듯이 걸어? 너 그러다 금방 지친다니까."

 우리는 이런 말을 하려고 자주 만났다. 그와 하는 얘기는 뭐든 재밌었거든. 빨리빨리 세상을 돌아보고 온 내가 그 얘기를 모아놨다가 들려주면 시내가 천천히 둘러본 자신의 얘기를 보여준다. 우리는 속도는 달랐지만 좋아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좋아하려고 많은 귀엽고 멋진 것들을 함께했다. 이 작가 좀 보라고, 이 영화 봤냐고, 여기 수영하러 가자고.


 런던에 내가 2년 살러 간다고 했을 때 그는 한국에서 아이슬란드에 가려면 영국을 경유해서 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영국에도 꼭 가겠다고, 그래서 영국에서 놀다가 같이 아이슬란드에 가겠노라고(본심) 술을 마시며 약속했다. 굉장한 길치에 외국여행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이 아이슬란드 가는 길은 아주 훤하네 하며 빈정거렸지만 나는 2년 동안 런던에서 시내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영국에 오기 전에 만난 사람들 중 그렇게 호언장담한 사람이 30명쯤이었다면 실제로 런던으로 온 자는 한 손에 꼽았는데 시내는 무려 세 번째 방문자였다.


 어느 날 시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에어웨이브스(Air waves)라는 게  있다고 했다. 겨울의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전체가 무대가 되는 아이슬란드 최대 음악 축제라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뷔욕과 시규어로스도 거의 매해 공연한다고 했다. 어디던 간에 누가 뭘 하자고 하면 따라나서는 나는 바로 먹이를 물었다. 그렇게 시내는 이제껏 수리된 중 가장 긴 휴가를 내고 런던에 왔(들렀)다. 우리는 런던에서 며칠을 지내고 레이캬비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감격에 겨워 울먹였다. 시내를 달래 공연 부스가 닫기 전에 에어웨이브스 티켓과 일정표 받으러 갔다. 다음 날부터 시작하는 이 축제는 공연장, 술집, 레코드샵, 브루어리, 프린트 샵, 길거리에서 공연이 하루종일 열렸는데 그것들을 잘 챙겨보려면 계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보로 이동가능한 레이캬비크를 하루에 이만보씩 걸으며 텀블러 안의 면세점에서 산 그레이 구스 보드카를 홀짝이며 몸을 녹였다. 칼바람과 눈, 비를 헤치고 들어간 생각지도 못한 공연에서 술기운에, 노래가 너무 좋아서 또는 말도 안 되게 추워서 시내와 나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우리가 아이슬란드에 있다며 감격의 눈물과 콧물을 흘렸었다. 그때 생각을 하면 그레이 구스 배(pear) 맛의 향기가 밀려오면서 코과 귀가 시리고, 보드카와 핫팩으로 무장한 배는 뜨끈하고 발은 꽁꽁 얼어붙을 것만 같다.


 꿈같은 3일이 지나고 우린 수도에서 조금 벗어나 4일간 오로라와 게이시르(geysir) 같은 아이슬란드에서 꼭 봐야 하는 자연경관 투어를 가기로 했다. 음악축제는 어차피 집에 밤늦게 들어올 예정이라 호스텔의 싱글침대가 두 개 있는 방을 빌려서 썼었는데 투어에 곰이 합류하기로 해서 조금 더 큰 집을 에어비앤비에서 빌렸다. 친절한 호스트 사라는 일찍 도착한 우리를 위해 짐을 맡길 수 있게 해 주고 키를 정해진 곳에 두고 갔다.

 중심가와 조금 떨어진 곳의 이 집은 같은 평면이 뒤로 일정간격 이동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타운하우스 같은 형식의 주거였다. 1-2인이 살기에 적절한, 방 하나, 거실하나의 공간이었으나 거실에 소파베드를 하나 더 두고 최대 3인을 허용하는 에어비앤비로, 사라는 운영하고 있었다.  나와 곰은 더블침대가 있는 안방(bedroom)에서 자고 시내는 거실의 소파베드에서 지냈다. 거실은 남과 북의 지면의 높이가 1.5M가량 차이가 나서 남쪽(도면 아래)은 반정도 땅에 묻혀 있었는데 외부가 탁 트여있고 정원으로 꾸며져 있어 불쾌한 느낌 없이 상쾌했다.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창이 많이 나 있고 북쪽으로의 창은 과감히 없앴다. 커다랗게 뚫린 남쪽 창을 통해 보이는 산과 하늘, 그리고 고양이들을 보며 우리는 시내의 시간에 맞춰 천천히 추위를 녹였다. 11월은 아이슬란드는 한국의 겨울에 익숙한 우리에게도 칼태풍과 비바람으로 공포스러울 만큼 혹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든 실내에만 들어가면 반팔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온기가 가득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 너무 전기를 낭비하는 거 아니야?"

 자손들에게 한글보다 방을 나올 때 불 끄는 법을 먼저 가르쳤던 조부모의 손녀답게 나는 말했다.

    "여기는 전기세를 안 내. 사용량이 발전량을 못 따라가거든."

 아이슬란드 덕후답게 시내가 아이슬란드의 난방 문화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한낮에도, 한 밤 중에도 불이 켜져 있는 집이 많은 것을 나에게 이해시킨다. 이 남아도는  전기를 수출하는 것은 현재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전력을 잃지 않으면서 이동시키는 것이 굉장히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온 초전도체의 발전, 보급으로 까까운 미래에 아이슬란드에서 자가 발전해서 얻은 전기를 가까운 영국으로 수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추운 날씨에도 옷을 껴입고 엄청난 전기세를 제일 무서워하는 2023년의 런던의 나는 상상해 본다.


정원을 산책하는 아이슬란드 고양이

   이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슈퍼에 술과 음식을 사러 갔다가, 디자인하는 사람들(우리 셋)이라면 정신을 쏙 빼놓고 사게 될 수밖에 없는 예쁜 포장의 초콜릿을 발견했다. 너무 예쁘다, 진짜 예쁘다 하며 여러 가지 맛을 샀던 것을 먹어본다.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사탕이나 초콜릿, 젤리 중에 감초맛이 있다. 리커리시(licorice)라고 하는 유럽의 감초는 한국의 감초와 같이 한약 맛이 난다. 나는 정말 싫어하고, 곰은 정말 좋아했다. 처음 먹어보는 시내의 반응을 나와 곰이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우웩"


 리커리시맛을 제외한 오리지널 초콜릿이 너무 맛있어서 시내는, 한국의 친구들한테 하나씩 선물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마지막 날 아침에 서둘러 슈퍼가 오픈하는 시간에 맞춰 가서 아이슬란드 초콜릿을 쓸어 담아왔다. 언제나 짐을 잘 싸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는 나는 낑낑대느라 몰랐지만 10분 만에 짐을 싸는 짐 싸기 달인 곰이 느릿느릿 캐리어에 짐을 담는 시내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럴 수 있지'가 장착된 곰이 나중에 말했다.

    "시내가 리커리시를 무척 좋아하게 됐나 봐, 제일 큰 초콜릿을 리커리시 맛으로 20개나 샀어."

    "뭐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계속 맛없다고 했었는데?"

 시내는 짐을 싸다 말고 창문에 고양이가 나타나자 마지막 날이라며 해맑고 아쉽게 인사하고 있다. 나는 얼른 시내를 그 모드에서 깨웠다.

    "시내! 사람들한테 선물로 준다며? 왜 리커리시 맛으로 샀어? 벌칙이야?"

    "무슨 소리, 이거 다 오리지널로 샀는데. 자 이거 봐봐.... 리커리시???? 으악!"

 오리지널을 집으려던 손이 살짝 방향을 왼쪽으로 튼 거겠지, 키득거리며 나는 마저 짐을 정리했다. 이렇게 벌칙 같은 선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 때문에 또 그것 또한 좋은 에피소드다 생각하라고 했지만 시내의 눈알이 로봇처럼 본 적 없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다시 슈퍼에 가서 바꿔와야겠어. 이거 진짜 똥맛이란 말이야."

 공항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아챈 시내가 심각하게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긴급하게 무엇인가 해야 할 때 시내는 천천히 삐걱거렸다. 곰이 그걸 알아채고 같이 가서 오리지널 맛을 찾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현관문이 닫히고도 "오노, 오 마이갓" 하는 시내의 소리와 키득키득 웃고 있는 곰의 목소리가 함께 몇 초간 들렸다.


 남자친구와 오랜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이 굉장히 부담이 되었지만 곰, 시내 모두 나보다 아량이 큰 아량곱빼기의 사람들이었음을 이 여행을 통해 또 배운다. 여행 내내 시내는 항상 '내가 아이슬란드에 있다니!'의 여태 본 적 없는, 뺨이 한 껏 올라가 있는 옆모습이었고, 곰은 느긋하지만 재밌는 게 있는지 찾는 장난꾸러기의 옆모습이었다. 그 둘의 다른 옆모습을, 나는 감사하면서 몇 번이고 봤다. 처음 보는 친구의 외국인 남자친구와 여행을 가는데 동의한 시내에게도 내가 보르도에서 느꼈던 긴장과 안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건 겉으로는 덤덤하지만 속은 세심한 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러나 우리는 싸우지 않고 꽤 재밌게 감동적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것은 100% 우리가 싸우지 않고 다치지 않고 재밌게 여행하게 해 주시라며 폭포와, 게이시르(Geysir), 무지개, 오로라를 보며 내가 속으로 싹싹 빌었기 때문이다. 근데 옆에서 시내와 곰도 빌었을 것이다. 춥다물이 갑자기 예민보스 싸이코로 변하지 않게 해달라고. 유황 성분 때문에 마치 썩은 달걀 냄새가 나는 아이슬란드의 수돗물을 미워하던 나에게, 곰은 '방귀 샤워' 했다고 아침마다 찡그리며 웃었다. 덩달아 나도, 시내도 웃었다. 마지막 날 공항에 가는 버스를 감초 맛 초콜릿을 잘 못 산, 자신 때문에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내가 책임지겠다며 택시를 잡는 느리지만 단단한 아이슬란드 마스터 시내덕에 정신도 간신히 붙들었다. 여행을 할 때 가장 못난 내 모습에 종종 놀란다. 그런 나에게 최악의 상황에서도 개그를 시도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침착한, 아량 곱빼기의 여행동지들은 본보기가 된다. 나도 물에서 썩은내가 나도 개그를 던지는 이가 되겠노라, 비행기를 놓칠까 노심초사할 때도 정신을 차리고 저 멀리 택시를 호령해 가는 데까지는 가보는 자가 되겠노라고.


 아이슬란드 여행을 끝내고 함께 런던으로 돌아온 다음 날, 시내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 회사 근처로 무게를 초과한 캐리어를 끌고 온 어기적 어기적 나타났다. 초과운임비 내는 거 아니냐며 내가 걱정하자 그는 "됐어. 뭐 별일이야 있겠어." 하며 느릿느릿 워털루 역 개찰구 뒤로 천~~천~~~히~~~~ 사라졌다. 나는 "으이구 속 터져, 공항 가는 길 잃지 말고!" 하면서 얼른 뒤돌아 눈물을 닦고 회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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