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반지하와 산울림
London, England 2023
엠마와 데미안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생활동반자'로 함께 살고 있는 커플이다. 한국에는 아직 없는 시스템이지만 유럽 국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고, 이 사회보장 제도는 결혼과 동일한 사회적 혜택을 함께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해 왔던 영국 사회에 아주 중요한 제도다. 이 생활동반자 둘 중, 건축가인 엠마가 경매에 눈을 뜨고, 데미안의 또래보다 안정된 경제력이 이에 더해져 시세보다 낮게, 생각보다 빠르게 집을 구매하게 됐다. 고쳐야 할, 고치고 싶은 부분이 많은 집이었지만 직접 조금씩 고치면서 살자고, 다른 어리석은 젊은이들처럼 영혼을 끌어다 계약서를 썼다. 그 공사는, 그 집에 살면서 진행하기에는 기간으로도, 예산으로도, 육체적으로도(퇴근 후에 페인트 벗기다가 기절해 잠들기), 정신적으로도(건축가가 자신의 집을 고친다? 내 마음에 불지옥 시작)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 시작한 지 몇 개월만 아예 나와서 살면서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때 마침 최근에 집을 사서 고친, 윌의 지하층이 비어있었다. 우리 힙스터 디자이너 윌이라면, 집을 얼마나 잘 꾸며 놓았을지 안 봐도 뻔한데 한 동네에 살면서 너무 잘 봐버렸기 때문에 엠마와 데미안은 친구, 윌이 에어비앤비로 단기 임대를 주는 지하층을 몇 개월 빌리기로 한다.
지하라고? 내가 처음 서울에서 혼자 지냈던 성북동의 반지하 반전세 집이 떠올랐다. 그 집에는 화장실로 곤충들이 심심찮게 들어왔다. 화장실 창문이 지면에서 채 10cm도 올라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런던의 '지하'는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외벽이 지면에서 2-3m는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하 같은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거기다 데크와 정원이 연결되어 있다면? 이 집은 지하층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환하고 청명 상쾌한 그런 집이었다. 그래서 임대료도 전혀 지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엠마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길에서 내려오는 계단을 따라 평면 왼쪽의 현관으로 들어오면 지하벽과 맞닿은 창고와 오른쪽으로 복도가 나온다. 그리고 계단을 3칸 더 내려오면 커다란 욕실이 나오는데, 이곳은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낮은 채도의 진한 오렌지색 타일을 바닥과 벽에 시공했는데, 프랑스 남부는 모두의 꿈이지라고 윌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화장실 진짜 예쁘다아-하며 호들갑을 떨며 거실로 들어섰다. 엠마와 데미안의 고치는 집에 가서 페인트 칠 하는 것을 같이 도와주고 나서 피곤하다고 그냥 가겠다는 나를, 절대 그냥 못 보내며 꼭 저녁을 만들어 주겠다는 그들에 의해 땀에 젖고 머리가 엉클어진 채 끌려온 평일 저녁이었다. 작게 깍둑썰기한 두부를 튀기듯이 오븐에 굽고 내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채소를 각각 따로 볶아 비빔밥을 만들고 있는 엠마를 흐뭇하고 바라보면서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도와줄 것 없냐고 했더니 네가 오늘 칠한 페인트가 얼만데라며, 스포티파이에 요새 듣는 음악이나 추가해라고 엠마가 두부 고명을 뒤집으며 말했다. 데미안이 좋아하는 Boards of Canada의 초기 앨범이 벽장 위에 세워진 것을 흘깃 보고, 우리에겐 산울림이 있지, 산울림의 11집 중 '가지마'를 재생 리스트에 추가했다. 얘기를 하던 중에 시작된 노래가 나오고, 내가 가지마아아아아 하고 따라 흥얼거리니, 인덕션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엠마와 데미안이 동시에 뒤돌며 물었다.
"춥다물, 너 이 노래 어떻게 알아?"
"노래 추가하라며? 당연히 알지, 이건 바로 레전드 코리안 밴드 산울림이다."
"노 퍽킹웨이."
3년 전. 엠마와 데미안은 아무개의 하우스파티에 갔다가 우연히 이 노래를 듣고 너무 좋아서 샤잠으로 노래 제목을 찾아냈다. 'Don't go' by Sanulim. 그리고 나중에 찾아봐야지 하고 스포티파이 좋아하는 노래 목록에 넣어 놓고 집에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배경음악으로 깔았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항상 뭐야, 이 노래 좋네? 라고 물었다. 그래서 매번 틀었댔다. 한국어라고는 생각 못 했고(가사가 굉장히 쉽고 반복됨) 아시안인 것 같긴 한데, 일본어도 중국어도 아닌 것 같고 인도네시아 쪽인가 하는 생각까지 진행되면 항상 누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이 노래를 들을 때는 항상 파티 중이었기 때문에 매번 좋다고 새삼 느끼면서도 다음 날은 또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근데 이 노래 가사를 알고 따라 부르는 사람이 오늘 거실에 나타난 것이다. 이 생활동반자들은 3년 만에 비밀이 풀렸다고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다. 비밀은 아니었지만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을 잘 알기에 나는 흐뭇하게 조용필과 김완선도 재생 목록에 추가했다. 데미안은 조용필의 음악이 자기한테는 너무 로맨틱하다고 했고 엠마는 김완선을 이름을 수차례 따라 외웠다.
우리는 두부고명이 올라간 채식 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접이식 문이 활짝 열린 데크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며 남은 와인을 마셨다. 풀벌레 소리와 반대편 도로의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멀리서 좌우로 들렸다 멀어졌다. 우리가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어슴푸레한 윤곽이 드러났던 깜깜한 정원 끄트머리에 고양이 한 마리, 여우 한 마리가 시간 차를 두고 당연히 자기가 안 보이겠거니 유유히 지나다녔다. 저 여우는 우리가 아는 여우다라고 데미안이 입을 떼기 전까지.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여우가 갑자기 우리를 힐끔 보고 옆집으로 내달렸다. 소중한 귀여움을 함께 봐 버린 우리는 함께 오오 작게 긴 음을 냈다. 그 동물들이 정원에 오래도록 종종 찾아와서 건강하게 쉬었다 가기를 함께 빌었다. 내 반지하 화장실에 들어왔다가 쫓겨났던 벌레들에 미안해진 내가 피곤하다고 진짜 진짜 간다는데, 엠마가 가지마아아아아 라고 서툰 한국어로 김창완을 흉내 내서 크게 한번 웃고 마침내 그 아름다운 지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