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식 아파트와 고양이
Seoul, South Korea 2018
중앙 복도식의, 양쪽으로 마주 보는 세대들 사이로 어둡고 낮고 긴 복도를 따라 맨 끝에 있는 이 집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발걸음을 빨리 움직였다. 한쪽 전구가 나간, 오래 관리되지 않은 어두컴컴한 아파트 복도에 성의 없이 듬성듬성 배치된 외부용 형광등은 지나치게 새하얘서 조금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중에 하나는 곧 수명이 다 하려는 듯 지-잉 소리를 내며 번쩍, 번쩍 전류를 잃었다 되찾았다 아래로 지나는 사람들의 눈을 반만 감게 했다.
그렇게 눈을 찡그린 채, 어두우면서 눈이 부신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 들어와 맨 끝, 낡고 무거운 철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바로 욕실문이 보인다. 그 욕실에는 요새는 보기 힘든 창문이 있다. 최근 새로 지어진 아파트는 공조기를 중앙에 한 번에 배치하느라 화장실이 내부에 집중되어 창문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아직 외부공기가 드나드는, 얼마 남지 않은 아파트 화장실이었다. 맞아, 오래된 아파트도 이런 좋은 부분이 있었지. 좁은 현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기다란 복도가 나온다. 나는 이 복도가 얼마나 긴지 눈으로 따라가 보고, 거실이 바로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이 아파트가 단번에 좋아졌다.
"정우야, 잘했다. 잘 골랐어! 뭐랄까, 집이 캐릭터가 있어.“
"그렇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연식이 아주 오래된 이 신비로운 아파트는 마포구 합정동에 있다. 승강기, 주차공간이 없어도 건축 허가가 승인되던 시절의, 오직 세대수 늘리기에 급급했던 수도권 보금자리 마련 사업의 결과물이다. 합정역 주변 상권에 발달에 따라, 현재는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아파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임대인들은 집에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았고, 비교적 집에 대한 관심도가 낮았다. 그 덕에 임차인들은 벽에 못질을 보다 자유롭게 하고 부족한 부분은 조금씩 (알아서) 고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외국인 세입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재개발과 못을 자유롭게 박는 자유와 외국인 세입자 비중의 무슨 관계가 있나? 둘 다 조금씩 '관심밖인', '임시의', 이라고 생각하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나라고 생각하면 전혀 관계없고 그냥 여기가 합정동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낡았지만 재밌는 아파트를 정우와 미현은 좋아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는 사람일수록 집에 대한 애정도 불만도 큰 법이다. 그래서 맘에 들어 선택했지만 또 맘에 안 드는 곳을 이곳저곳 손을 봐야 하는데, 보통은 '원상복구의 의무' 때문에 여이치 않다. 그러나 임대인이 이 집을 허물어지기 만을 기다리는 와중이라면 임차인이 벽에 고작 못 한두 개 박는 것은 아무 일도 아는 축에 속했기 때문에 둘은 전기배선을 재정비하고 복도에 액자를 가득 걸어 갤러리를 만들 꿈을 꿨다.
또한 미현과 정우는 이 집에 새 식구 고양이 '꼬마'를 모셔왔다. 임시로 보호했던 꼬마를 잊을 수 없었던 둘은 밤마다 꼬마를 그리워하다가 이 집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 꼭 꼬마가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몸을 둥그렇게 만든 털 보숭이가 창 밖을 바라보고 있고, 또 따뜻한 그 모습을 매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해지는 집 같았다. 꼬마와 함께 자고 싶어, 조용하고 어두운 잠자는 방(bedroom)과 옷과 둘의 취미생활을 모아 놓은 옷방 겸 서재(dressroom&workshop)를 따로 지정했다. 잠자는 방에는, 자는 사람과 동물, 수면에 필요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었고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한 세간은 모두 옆방, 옷방 겸 서재로 들어갔다. 이를 테면 밝고 시끄러운, 사실은 거의 모든 것들 말이다.
방들 마다 천장 중앙에 길게 튀어나온 새하얀 백열등을 떼어내고 따뜻한 전구색의 펜던트 등으로 가는 일이 정우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 가장 먼저 한 일이다. 그래서 이 집은 아주 엹은 주황, 전구색으로 기억된다. ㄱ자 평면 깊숙이 자리한 거실과 부엌은 이전 집보다 조금 더 명도가 올라갔다. 집주인 온도와 비슷한 온도대로. 그 온도는 어떤 물건들의 유무와 중요한 합의들로 정해지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신선한 채소를 언제나 먹을 만큼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 둘은 채소 재배기를 샀다. 둘 다 잘하는 가사노동이 있지만 설거지는 누구의 강점도 아니라서 둘은 더 많이 싸우고 싶지 않아 식기 세척기도 들였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떠한 머그컵도 받아오거나 사지 않는 것에 합의했다. 가지지 않고서는 미치는 머그컵이 생기면 무조건 가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를 기부해야 했다. 술병들은 냉장고 위로 분명한 자리가 정해졌고 플라스틱 재활용이 사나흘에 한 번씩 꽉 차는 것을 피하려고 생수는 더 이상 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수돗물 정수가 가능한 물병을 구매했다. 그 정수된 물로 언제나 차를 마실 수 있게 식탁 옆에 벽장을 얇게 만들어 '차 장'도 생겼다. 이 집은 정말 정우의 웃음소리, 미현의 걸음걸이 같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 집의 옷방 겸 서재의 한 켠에서 이사 후 처음 며칠을 더 묵다가 타 도시로 이주했다. 같이 사는 시절은 그렇게 끝났지만 우리는 각자의 전쟁통에서 살고 있다가 때때로 밤늦게까지 춤을 추려고, 손바닥을 부딪치며 웃으려고 만났다가 이 집에서 함께 잠들었다. 고르릉 꼬마의 숨소리와 보글보글 가습기 소리만이 안방에 들렸다. 선잠에 들었다가 누군가 방귀를 뽕 뀌면 ‘누구야 정말’ 조금 더 웃다가 잠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우동생 정민이가 대만에서 돌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안방에 정우, 미현, 정민, 나, 꼬마 이렇게 4명의 인간과 1마리의 고양이가 잘 수 있는 날을 만들었다. 정말 잘 돌아왔다고 안아주고 환영해줘야 하니까. 아주 살려고 큰 결심을 하고 갔던 대만을, 생각보다 일찍 떠나온 그의 얼굴은 내 예상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는 밝은 얼굴로 오는 길에 좋은 위스키를 가지고 왔다고 커다란 박스를 내밀었는데 그 위스키 병의 크기를 보고 나서 나는 조금 슬퍼졌다. 어디엔가는 있을 텐데 짐작해 보던 그의 상실감의 크기와 딱 맞아떨어져 보여서다. 언니 헛소리하지 말라고 정민이가 좋은 향의 위스키를 내 앞에 따라줬다. 그 위스키와 차를 번갈아 마시며 거실의 식탁에서 믿을 수 없게 웃음의 공백없이 이어지던 정우의 멋진 할머니 얘기, 미현의 작가 친구 이야기, 정민의 대만의 오신채 이야기, 나의 효창공원 전남친 이야기들을 생각한다. 그러면 막 제조가 끝난 뜨끈뜨끈한 인절미처럼 부드럽고 기분 좋게 건조한 꼬마의 뱃살과 털이 손 끝에 만져지고, 안방에서 조용히 돌아가던 가열식 가습기의 보글보글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어떤 집은 이렇게 많은 좋은 이야기와 살아있는 감각들로 기억되는데 그렇다면 집주인이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현관문을 활짝 열고 그들의 세상을 듬뿍 보여주려고 깊은 자리를 내준 것이라서. 그러려면 나도 집주인을 사랑해야 하는데 나는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고양이 알러지때문에 아침에는 숨을 헐떡이며 눈이 시뻘게진 채로 나오게 되지만 항상 이 집에 갈 구실을 만들었기 때문에. 빵을 만들어 지나가는 길에(일부러 돌아감) 들렀다고 빈 집 문에 걸어두고 왔던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