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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정 Apr 09. 2024

빈곤 서사시, 조문영 《빈곤 과정》

여전히 거지가 있는 한,

빈곤 과정

여전히 거지가 있는 한, 신화는 있다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중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를 칭송하는 목소리를 듣다보면, 분명 빈곤이 낯설게 느껴진다. 적어도 실존을 위협하는 빈곤은 자본주의 생산력의 증대로 복지를 통해 실존적 빈곤은 소멸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분명 삶은 고단하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오르고, 노후 대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하다. 카페인섭취를 통해 불면증과 만성피로는 참을 수 없이 괴롭다. 아직까지 큰 질병도 없는 노동 가능한 인구이고, 그래서 노동을 토대로 '일용할 양식'정도야 스스로 벌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범주는 뿌옇고 희미하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잘 모르겠다는 말을 통해 흐리게 만들며 암흑을 외면하지만, 그런 어둠을 직시했을 때 실존적 차원으로 번질 수 있음을 안다. 아무런 탈이 없는 탄탄대로의 미래도 두려운데, 경제 위기와 전쟁 위기 등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가 터질까 두렵다. 게다가 미래에도 지속될 것 같은 저출생 위기와 점차 피부로 느껴지는 기후 위기 등 그동안 상상하기 힘든 위기들이 겹쳐있다. 그런 위기들이 터지면, 저자가 말한대로 빈곤은 실존적 차원의 문제가 된다. 그런 실존적 위기가 드리워지는 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빈곤으로부터 시작되는 실존의 그림자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늘 머물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 이 말을 운동권식으로 표현하면 민중이고, 마르크스 용어로 표현하자면 피지배계급에게 빈곤은 멀지 않은 자신의 문제이다. 그러니 빈곤을 조금 더 주요한 정치 및 윤리의 의제로 이야기해하고, 더 많은 연구서적이 빈곤의 구조를 파혜쳐야 한다. 이 책 역시 그런 연장선에 있다. 빈곤 레짐을 다루는 여러 책들처럼, 학술적으로도 접근하나 학술적 보고서라기보다 대중속으로 들어가 빈곤한 이들의 땀과 피로 기록한 대중친화적 연구서이다. 한국을문학적인 진술로 생생한 빈곤한 이들의 느낌을 살렸고,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학술적 층위에서도 주목할 수 있게 이론과 현실을 아우르는 저술로서 빈곤한 자들의 서사시를 써내려간다.


총 9장으로 이뤄진 이 책에는 빈곤 레짐을 집대성하고, 더 나아가 작가의 해결책도 담겨있다. 제1,2장은 빈곤에 대한 논의와 대응을 통해 빈곤 레짐에 생겨난 문제를 다룬다. 그래서 1장에서는 유럽-한국의 사회보장 역사에 대한 검토 및 서울 난곡 지역 현장 연구를 토대로, 국민기초생활제도를 통한 수급의 의미를 다룬다. 그러면서 현상황에서 빈곤이 정치적 의제화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를 다룬다. 제2장에서는 의존 담론을 다루며, 계보학적 접근과 서구중심적 자율 담론에 대한 인류학적 비판을 하고, 낙인으로서의 의존이 자연스러운 경로도, 불가피한 귀결도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두 가지 사례를 드는데, 하나는 중국 둥베이지방 노동자들의 생활 세계에서 의존의 의미가 변화한 것과 자활이 복지 수급과 접속하기 이전에 상호의존으로 상징되던 한국 빈민운동의 역사다. 3,4장에서는 두명의 중국 여성에 대한 문화기술이다. 가난한 사람의 삶은 빈곤 레짐과 부분적으로만 연결되어 있고, 빈자를 약자 내지 피해자로 그리기보다 다른 사람, 제도, 지식, 매체 등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빈곤의 가중화-소외에 저항하는 필사적 노력이 다른 소외를 낳았는지 검토한다. 5,6장에서는 21세기 들어 부상한 글로벌 빈곤 레짐의 의미와 작동 그리고 실존의 불안을 호소하는 청년들이 자원봉사자로서 글로벌 빈곤 퇴치의 책무를 자임하는 역설을 말한다. 윤리적 자본주의가 주목받는 가운데, 대기업 자원봉사단의 활동을 통해 빈곤 현장을 검토한다. 7,8장은 5,9장의 연장선에 있는데 아시아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 위기를 거치며 일상에 들러붙은 불안의 정동은 빈자와 프레카리아트, 빈곤과 취약성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점을 다룬다. 빈곤-수급자에 편중된 연구는 빈곤의 범주를 축소하며, 오늘날 취약한 삶들이 부단히 마주치고 때로 반목하는 현실을 볼 수 없게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8장에서는 프레카리아트를 다루는데, 문화기술 형식으로 생생한 현실을 담아낸다. 9장은 결론이자, 작가 말대로 새로운 시작이다. 팬더믹을 비롯한 기후위기에서 빈곤의 의미, 지구거주자의 윤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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