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푹 잤다.
재촉하는 알람소리 없이 개운한 느낌으로 잠에서 깼다.
몇시 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느낌에 5시쯤 된 것 같았다.
5시 30분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릴때 까지 좀 더 빈둥거릴지 아니면 지금 바로 일어날 건지 잠깐 고민을 했다.
털복숭이 막둥이가 내가 깬 걸 눈치 챘는지 발치에 누워있다가 내품으로 쏙 들어와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품에 안긴 막둥이의 복실복실한 가슴털을 만지고, 배를 쓰다듬고 꼬순내를 맡았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알람이 울릴 때 까지 그냥 이렇게 누워 있기로 했다.
편안하게,그리고 따뜻하게.
이제는 강아지의 체온을, 털이 주는 복실함을 온전히 편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따뜻한 온기가 나도 모르게 설움과 슬픔과 눈물을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것을 , 또 그 따뜻함이 컴컴한 새벽 유일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난 시간을 통해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냥 온전히 따뜻하고 포근함을 느끼며 편안해 할 뿐이다.
아침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바랬었다.
설겆이 후 행주로 닦으면 사라지는 씽크대의 물방울처럼,
뽀얗게 피어오르는 순간 사라지는 수증기처럼.
그렇게 사라져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면서 동그랗고 멀뚱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강아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마치 다트판이 된 것 같았다.
그들의 눈빛과 태도와 말투 들은'당신은 자격없는 리더야, 당신은 무능해' 라고 하는 무언의 다트였다. 날카로운 촉에 날개를 달아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내리꽂기 위해 조준하고, 신중하게 날리는 다트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하루를 버티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버티며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내게 박혀있는 것들을 숨막히게 어둡고 무거운 침묵의 날개를 단 다트로 만들어 다시 내 가족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내게 말 시키지마,
알아서 해,
내 옆에 오지마.
나를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둬.
지키고 싶었다.
좋은 리더가 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을 지키고 싶었다.
힘든시기에 믿고 따라와 준 부하직원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을 지키고 싶었다.
어려운 시기에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로 나를 선택해 스카웃한 사람들의 믿음을 지켜내고 싶었고,
엄마가 거기서 일하는거 은근히 뿌듯해 라며 시크하게 고백하듯 말하던 아이들의 자부심을 지키고 싶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갑작스런 문제도 잘 해결해 나가고
매일매일 올라오는 빡빡한 스케쥴을 멤버가 모자란 와중에도
큰 트러블 없이 잘 이겨내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싶었다.
힘들어하는 멤버들을 다독이고, 때로는 기강을 잡으며 잘 이끌어 나가는
좋은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역시 전문직이 답이다."라며 스카웃되어 이직하는 나를 부러워하던 친구들에게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모든 것들을 지켜내고 꾸준히 보여주면서 대체불가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가족에게도,직장에서도 그리고,나 자신에게도.
언제부턴가 그 곳은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처럼 느껴졌다.
내 자리라고 굳게믿고 앉아서 영화를 한참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
"여기 제 자리인데요."하고 당당하게 내가 앉아있는 자리를 요구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의 티켓도, 또한 나의 티켓도 확인할 수 없고,
그저 가만히 일어나서 비켜줘야 할 것만 같았다.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의 눈밖에 났다는 것은
나의 말과 생각은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는 것,
단계를 거친 업무처리도 나의 실수가 된다는 것,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도 내게 등을 돌리는 것,
그들이 쑥덕거리는 말들이 진실이 된다는 것,
나를 점점 더 허수아비로 만들어가는 누군가가 인정받는 것.
그런 것들 이었다.
힘들지 않냐고 물어봐주길
이야기를 들어주길...
누군가 한 명은 제발 그래주길..
하지만,가만히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
나는 감사하고 있었다.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고마웠다.
4년하고도 4개월을 일한 모든 시간이 이모양은 아니었다.
마지막 6개월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이전의 시간들은 꽤 괜찮은 날들이었다.
우리는 함께 고민했고, 함께 걱정했으며 함께 땀을 흘렸다.
힘들어도 즐겁게 일하던 그 때에는, 우린 한 팀이었다.
그렇게, 지킬 수 있다는 믿음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고,
잘 보여주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날들이었다.
그 날들이 그리웠다.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나의 부족함을 채워나가면 돌아갈 수 있을거라 믿고 싶었다.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걸거야.
내가 좀 더 잘하면 될거야.
그래, 내가 조금 부족해서 그렇지.
어쩌면 피곤해서 더 마음이 안 좋은 걸거야.푹 쉬면 금방 좋아져.
맛있는 거 먹고 기분 풀자.
술 한잔 마시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괜찮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야 해.'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하면서
'차가 이대로 전복이 되면, 이 다리 아래로 차가 구르면 출근을 안해도 될텐데..'
라는 생각을 한 그날, 나는 깨달았다.
'아...나 지금....안 괜찮구나..'
그리고, 그 때 부터 멈추었다.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고 못나서 생긴 일이라는 자책과,
잊기 위해 마셔대던 술과,
스스로에게 수없이 쏟아내던, 괜찮다는 말을...
남편에게만 알리고 천천히 이직을 준비했다.
새로운 직장의 조건은 간단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 그리고 이곳만 아니면 됐다.
첫번째 면접에선 연락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두 번째 면접 에서는 그자리에서 합격통보를 받았다.
이제 어느 부서의 부서장도 아니고,누군가들의 리더도 아닌 평간호사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퇴사할 거란 말과 함께 곧 새로운 곳으로 출근할 거라 말했을 때 아이들은
"그 곳을 그만두는 걸 축하한다."고 말했다. 아이들 역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들은 지금까지 쌓아 온 경력과 능력들이 아깝다고 다시 생각해보란 말들을 했다.
나는 대답했다.
그 모든 걸 놓은 대신 나를 잡았으니 된거라고,
하나도 아까운 거 없다고.
완벽하게 실패한 리더, 그게 나다.
어느 것도 지키지 못했다.
많은 것들을 보여주긴 했지만,
보여준 것들로 나를 증명하진 못했다.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편안하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