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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May 28. 2022

사기치고 미국 가다.

대환장 해외출장 story - 1 -

정소영 선생님, 여권 유효기간 얼마나 남았어요? 넉넉하죠?


아직 초보 티를 벗지 못했던 회계법인 2년 차. 시즌의 정점을 막 지나고 있던 때, 한 번도 같이 일해본 적 없는 매니저(Manager, 차장급) 선생님으로부터 난데없는 전화를 받았다. 여권이 있는지, 유효기간은 넉넉한지, 출국하는데 결격사유는 없는지를 물으셨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냐고 되묻는데, 설마 하는 생각에 내 가슴이 콩닥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한테도 올 것이 왔구나. 해. 외. 출. 장...!


이미 2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었던지라 국내 출장에 대한 환상은 와장창 깨진 지 오래였지만('현실과 이상 사이, 나의 출장 첫 경험' 글 참조), 해외출장은 달랐다. 빳빳한 트렌치코트를 입고 캐리어를 샤샤샥 간지 나게 끌며, 북적거리는 인천공항으로 또각또각 들어서는 나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근사했다. 공항 갈 때 뭘 입지...? 벌써 머릿속이 분주했다.

회계법인에서 근무를 하면 국내 출장은 밥 먹듯 다니지만, 해외 출장의 기회가 많지 않다. 10년을 근무해도 해외출장을 한 번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이 꽤 많다. 나 역시 이 에피소드가 6년 근무 중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출장이었다.


출발은 당장 나흘 뒤, 행선지는 미국의 '마운틴 뷰(Mountain View)'라는 도시였다. 유럽과 아시아는 나름 이곳저곳 가봤지만, 그때까지 미국 땅은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나였다. 첫 해외 출장이 미국 출장이라니... 콩닥대던 가슴이 펄떡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름이 촌스러워 어디 구석탱이 시골일 거라 생각했던 '마운틴 뷰'라는 도시는 무려 구글과 페이스북, 애플의 본사가 위치한, 실리콘밸리 내에서도 Top Tier로 분류되는 곳이란다.


꿈에 그리던 간지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십 대 초반 여자 회계사의 실리콘밸리로의 출장'. 근사하지 않은가? 처음 회계사가 되었을 때 내가 꿈꿨던 출장은 이런 거였다. 천안의 모텔촌이 아닌 '실리콘밸리'. 정말 매일을 2-3시간 자며 일하고 있던 때라 시즌만 끝나면 퇴사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계사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는 국내 출장으로 온갖 모텔촌을 드나들며 신음하던 나를 하늘도 불쌍히 여기시는 듯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이 흘러나왔다.


선생님, 영어 잘하시죠? 영어로 업무해야 하는 출장이에요.


아뿔싸... 망했다. 저 질문을 듣고 내가 대답하기까지 몇 초 간 정말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영어를 못했다. 웬만한 건 내가 다 잘하는데(?) 영어는 정말 못했다. 학창 시절 내내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이 '영어'였다. 특히 회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토플시험을 준비했을 때도 읽기와 쓰기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지만, 듣기와 말하기에선 아주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상무님과 매니저 선생님은 내가 동기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젊은(?) 사람이라 당연히 영어를 잘할 거라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왠지 영어 잘하게 생겼다고... 그건 어떻게 생긴 걸까..?


사실 회계사들(AICPA 제외) 중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물론 해외 거주 경험이 있거나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극히 드물고 귀했다. 업무 중 영어를 쓸 일이 많지 않기에 회계법인 지원 후 면접을 볼 때도 높은 토익점수나 회화능력보다는 '나이'와 '출신학교'가 당락을 좌우했다. 종종 외국계 기업의 감사를 맡게 되면 영어로 된 재무제표와 명세표들을 받아야 했지만, 어차피 우리는 '숫자'로 말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간단한 영어 계정명에 대한 이해만 있으면 감사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외국계 회사의 회계/재무팀 직원들도 결국 한국인이기에 소통으로 애를 먹을 일도 없었다.


하... 어쩌지... 출장을 가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잖아... 다시는 없을지 모를 기회다. 놓칠 수 없다. 어느새 내 입에선 뻔뻔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아... 아주 잘하지는 못하는데, 뭐 적당히는 해요.


결국 나는 사기꾼이 되기로 했다.

일단 다음 일은 미국 땅을 밟은 후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간 큰 사기꾼의 참혹한 미국 출장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출국 당일 올렸던 오글거리는 포스팅. 엄청 설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가올 대환장 파티를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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