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정신으로 그 긴 비행을 했는지 모르겠다. 불편한 분들을 양쪽에 모시고, 뚝딱뚝딱 영혼 없이 노트북을 두드리다 보니 착륙 안내문이 흘러나왔다. 사실 네댓 시간만 일하는 척하다 잠을 청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팔걸이도 없고, 조금만 뒤척여도 이사님이나 매니저쌤과 부딪칠 것 같아 불편했다. 비행 막판에야 겨우 1시간 정도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잠을 잔 건지조차 아리송했다.
이미 한두 달간 시즌을 겪으며 계속되는 야근 강행군을 해왔기에 체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침대에 누워 쥐 죽은 듯이 2시간만 자고 싶다고 속으로 울부짖으며, 인간이 이보다 더 피곤할 수는 없겠다고 확신했다. 그런 와중에 이사님의 잔인한 한마디가 또렷하게 내 귀에 와 박혔다.
내리자마자 바로 회의가 있으니 우선 회사로 가자.
이럴 수가... 도착하면 미국 현지 시각으로 아침이라 어느 정도 당일 출근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조금의 쉼도 없이,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바로 출근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사님과 매니저님 모두 마냥 편한 차림은 아니었다. 아마 바로 출근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셨으리라.
공항에서 1시간 정도 거리를 내달려 마운틴 뷰에 도착했고, 회사 분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바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실사로 회사에 투자금이 들어오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상태였기에, 회사분들은 우리에게 조심스럽고 또 친절하셨다. 회사 담당자분들은 대표님을 포함해 총 네 분이었고, 모두 미국분이시니 당연히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안 그래도 피곤함에 사무쳐있던 상태였는데, 맨 정신에 들어도 잘 들리지 않는 영어가 들릴 리 없었다. 게다가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회사 소개와 재무 상태에 대한 브리핑이다 보니 어려운 용어와 복잡한 숫자들이 번갈아 등장했다. 회의실을 가득 메우는 영어 대화들은 어느 순간 내게 더없이 좋은 자장가가 되었다. 내가 졸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인지되는 상태였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제멋대로 꺾이는 목에 스스로 놀라 잠이 깨길 서너 번 반복하다 보니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부끄러움과 괴로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프로페셔널하게 보여도 모자랄 판에 입도 제대로 한번 뻥긋 못하고 락커 같은 모습만 보였다니..
회의가 끝나고 간단한 점심식사가 이어졌다. 정신은 드디어 깨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입은 깨어나지 못했다. 심봉사가 심청의 효심에 감동받아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듯, 하늘도 나의 미국 출장에 대한 열망을 가엾게 여겨 입이 번쩍 뜨이게 해 주셨으면 좋으련만... 그런 어설픈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함께 온 선생님 두 분은 모두 각각 미국과 영국 딜로이트에서 1년 이상 근무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라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셨다. 나는 선생님들과 회사 분들의 대화를 숨 가쁘게 따라가며 계속 긍정의 미소와 과한 리액션을 동반한 짧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영어도 잘 못하는 주제에 사기를 치고 이곳까지 출장을 왔으니, 이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다. 4일의 필드 웤(field-work) 일정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밤새도록 비즈니스 영어라도 공부해야 하나. 이런저런 걱정으로 머릿속이 분주하던 그때, 이사님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찌그러져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회사 분들께 나에 대한 칭찬(?) 한마디를 꺼내셨다.
정 회계사는 대학에서 경영학과 함께 중국어를 전공했습니다. 아마 영어보다 중국어를 잘할 거예요. 껄껄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내 대학시절 제1 전공이 중국어인 것은 맞지만, 3학년 재학 당시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후 중국어에 대한 학업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래도 뭐 내 중국어 실력은 이곳에서 검증될 수 없으니, 알게 뭐인가. 영어는 못하지만 중국어라도 그나마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면 덜 민망하겠다 싶어 부정하지 않고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 좋아 보이는 대표님이 정말 환하게 웃으시며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를 내게 건네셨다.
我是中国人。 你好。 (저 중국인이에요. 안녕하세요.)
상상도 못 했던 시나리오였다. 아시아계 미국인인 대표님이 중국인일 수 있다는 생각은 대체 왜 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지금 먹고 있는 점심 메뉴도 아메리칸 차이니즈였다. 젠장...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에 사장님은 내게 중국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건네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는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