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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Oct 11. 2023

회계법인이 멀쩡한 회사를 청산시킬 수 있을까?

드라마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 1화 리뷰 - 1 -


[1화 '고졸회계사 장호우' 줄거리]


주인공인 '장호우'는 어린 시절 해빛건설 공사장에 버려지고, 사람 좋은 해빛건설 대표님과 함바식당 할머님의 사랑으로 키워진다. 그리고 약 10여 년 후 어느 날, 회생절차 중이던 해빛건설이 '태일회계법인'이 쓴 보고서에 의해 청산 결정을 받게 되고, 그 충격과 죄책감으로 대표님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은인이자 아버지와도 같은 대표님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인해 장호우는 심한 충격을 받고, 함바식당에서 우연히 들은 회계사들의 수상한 대화를 근거로 무언가 감춰진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분노에는 아무 힘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회계사가 되어 이 사건의 진실을 직접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고졸이지만 알고 보니(?) 머리가 엄청 좋았던 장호우.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목표했던 대로 국내 최고 회계법인이자 해빛건설의 청산보고서를 작성한 회계법인인 태일회계법인에 입사하게 된다. 고졸이라는 이유로 회계법인 내에서 온갖 무시를 당하면서도 그곳에서 당당히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호우!


회계사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이렇게 '뉴스'에 얼굴이 나올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해빛건설의 청산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이자 주인공 장호우를 각성시키는 계기다. 해빛건설의 청산에 대한 의구심과 분노를 품고 회계법인에 입사한 장호우가 '거대 악'에 맞서 온갖 비리를 파헤치며 진실에 다가서는 것이 이 드라마의 전체 줄거리.


보통 자금난을 겪게 된 회사는 채무를 일부 탕감받고 영업을 지속하기 위해 1) 기업회생을 신청하여 법원으로부터 관리를 받거나(법정관리) 2) 주 채권자(보통 은행)의 감독 하에 관리(워크아웃)를 받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이 드라마에서 해빛건설이 기업회생을 선택한 것인지 워크아웃을 선택한 것인지는 확실하게 나오지 않지만, 여러 설명으로 미루어보건대 기업회생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 드라마적 요소로 워크아웃의 특징이 약간 가미된 것 같다.

해빛건설이 왜 자금난을 겪게 되었는지는 드라마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표의 성품으로 보았을 때 방만한 경영 등으로 인한 것은 아닐 것이고, 기술 개발이나 투자로 인한 문제가 아닐지.. (나의 뇌피셜)


워크아웃이건 법정관리건 간에 어쨌든 기본적인 대원칙은 동일하다. 정상적으로 채무를 상환할 수 없게 된 특정 기업이 '계속영업을 지속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돈(계속기업가치)과 지금 '당장' 땅이며 건물이며 재고며 전부 팔았을 때 확보할 수 있는 돈(청산가치)을 비교해서 어느 것이 '채권자"에게 더 유리한지(빌려준 돈 중 일부라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계속기업가치와 청산가치를 산정하는 것이 바로 회계사들의 역할이다. 뿐만 아니라 향후의 자금 흐름을 판단하여, 기업을 계속 운영하게 될 경우 매년 채무를 얼마씩 갚을지 자금수지를 짜는 것도 회계사의 몫이다.


법원 주관 하에 이루어지는 법정관리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판사님들은 숫자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에 일반적으로 회계사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렇기에 사실상 기업의 존폐 여부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는 회계사들은 회생을 진행하는 동안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만 한다. 회계사의 보고서로 인해 한 기업과 수많은 채권자들, 더 나아가서는 그 채권자들과 관련 있는 또 다른 회사들과 투자자들까지 모두 영향을 받는다.


함바집에서 우연히 회계사들의 대화를 듣게 된 장호우
누가 들을 줄 알고 저런 얘기를...???! 회생 조사를 나가면 회사에서 정말 늘 말조심을 해야 한다.
이렇게 재수 없게 말하는 회계사도 단연코 없다... 청산가치가 더 높다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회계사들의 마음은 정말이지.. 천근만근이다.


드라마에서 해빛건설은 계속기업가치가 더 높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당한 힘에 의해 청산가치가 더 높은 것으로 보고서가 바뀌어 작성된다. 사실 기업의 '가치'를 산정할 때에는 아주 많은 '가정'이 개입되기에 같은 회사여도 회계사의 시각에 따라 각기 다른 계속기업가치와 청산가치가 산정될 수 있다. 똑같은 회사도 누가 평가를 했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기업가치를 산정하는 것이 핵심.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결과를 조작하는 것은 말 그대로 '범죄'다.



1화에서 가장 오글거렸던 장면. 해빛건설이 공사 중이던 건물을 철거하려는 용역깡패들과 장호우가 뒤엉켜 싸우고 있는데, 어디선가 멋지게 등장한 한승조 회계사가 "그만!!!"을 외친다. 그러자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용역깡패들이 각 잡고 길을 주며 현장이 정리된다. 회계사가 청산결정된 회사를 다시 찾을 일도 없다만, 회계사가 용역깡패를 부를 일은 더더욱이 없다. 저기 가면 두들겨 맞기나 하겠지... 저길 왜 가...


그리고 장호우에게 청산결정서를 내미는 한승조 회계사...

청산"결정'서에 회계법인의 이름이 쓰이지는 않는다. 최종결정은 법원이 한다. 다만 청산'보고'서나 회생보고서에는 파트너를 비롯해 조사에 참여한 회계사들의 이름이 모두 올라간다.
1화에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 중 하나^^.. 생사여탈권자라뇨.. ^^;; ㅠㅠㅠㅠ



나 역시 수십 개 회사의 회생을 진행하면서 정말 별의별 일을 다 겪어봤다. 회생조사에 나가면 대표님들이 정말 잘 대해주시는데(회계사가 '갑'으로 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 회생이다.), 몇 주간 조사를 하면서 정이 많이 든 회사 대표님께 청산가치가 높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늘 내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대표님과 직원분들의 피와 땀이 깃든 회사라는 것을 잘 알기에 괴롭고 복잡한 마음이 들어 밤잠을 설친 경우도 많았다.


청산가치가 높게 산정될 경우 내 앞에서 목을 매달 것이라고 협박한 대표님도 있었고, 회생을 진행 중인 대표자 가족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며 계속기업가치가 높게 산정되는 것이 정말 맞는지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다. 청산가치가 더 높은 보고서를 최종 제출 후 법원에서 마주친 대표님의 차가운 눈초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러나 사실 회생이 결정되든 청산이 결정되든 가장 큰 피해자는 기업이 아닌 '채권자'다. 회사야 부실 경영을 했든 잘못된 선택을 했든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을 테지만, 갑자기 억울하게 돈을 떼이게 된 채권자들은 사실 잘못이 없다. 


10년 전 (주)동양과 동양시멘트, 동양레저 등 '동양그룹' 5개 계열사의 회생신청은 일반 개인 피해자만 3만 명에 달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다. (내가 처음 참여하게 된 회생 업무이기도 하다.) 회생 재판 당시 법원에 출석하여 피해를 호소하는 개인들이 많았는데, 당시 혈기왕성한 막내였던 나는 그 사연들을 들으며 눈물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상무님께 크게 혼이 나기도 했다. (회계사는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너무 못났다.)

동양 사태는 나중에 따로 다뤄볼 예정


결론은 '청산가치가 높다는 회계법인의 보고서 한 장으로 회사를 문 닫게 만들 수 있다'는 문장이 과장은 아니라는 것. 물론 채무가 과다하거나 운영 상의 어려움이 있어 회생 또는 워크아웃을 진행하고 있는 부실기업들의 경우에 한해서다. 또한 청산가치가 높다고 해서 무조건 바로 청산이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법원이 회계법인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최종 심리를 진행한 후 결정한다. 또 계속기업가치가 높지 않더라도 '회생 M&A'나 새로운 투자를 유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청산하지 않고 살아날 길을 모색해 볼 수도 있다.


회생기업 조사 시 계속기업가치와 청산가치를 산정할 때 회계사들은 반드시 무거운 책임감과 직업윤리를 가지고 조사에 임해야 한다. 또한 실수이든 의도적이든 잘못된 결과를 도출해 냈다면 회계사들은 그에 따른 책임을 반드시 지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전문가'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높은 연봉을 받는 이유일테니까.





8월에 출산을 하여 한 동안 통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쓸 시간은 많았는데, 생이 바쁘다 보니 브런치에 접속하는 데까지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감사파트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주로 쓰다 보니 사실상 제 회계사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기업회생'에 대해서는 아직 쓸 기회가 없었는데, 이 드라마를 계기로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어 기쁩니다. 비록 드라마는 실패작으로 끝난 것 같아 아쉽지만, 리뷰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해볼게요. '하얀 거탑'같은 레전드 회계사 드라마가 나오는 그날을 기다리며..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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