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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라 Jan 10. 2021

임신이 끔찍할 줄 알았다.

인생은 예측불허

결혼하고 임신하면, 무궁무진하게 펼쳐져있던 내 삶이 갑자기 끝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줄 알았다.


더 이상 내 인생에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벤트는 벌어지지 않고,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무료하고 평범한 여생을 보내게 될 거 같았다. 돌이키기 어려운 결정들이다 보니 혹여라도 나중에 후회가 될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뭔진 몰라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재미없게 살아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 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인생은 참 생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막 입사해 취준의 고통에 작별을 고하고 있을 때쯤,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가 돌연 결혼하자고 했다. 그도 막 입사한 햇병아리였는데 어찌 그런 결심을 했나 싶. 일찍 결혼할 생각이 없던 나는 돈이나 나이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6개월을 미루다가, 어느 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울음소리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진짜인지 쇼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 흐느낌에 지다니, 나도 이 남자를 어지간히 사랑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기대가 없어서였는지, 결혼 생활은 꽤 만족스러웠다. 새로 마련한 내 보금자리에, 내 취향의 물건들로 채우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을 함께 지내는 건 평범할지언정 무료하진 않았다. 모든 일들이 다 난생처음이라 머리 빠지게 고민하는 하루하루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전의 삶보다 더 흥미롭기도 했다.


그렇지만 임신은 또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임신하기 전에는, 이게 그저 끔찍한 과정인 줄만 알았다. 취준을 견뎌야만 회사를 입사할 수 있는 것처럼, 아기를 가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기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계획과 커리어를 고려해 너무 늦지 않게 가지는 게 오히려 낫겠다는 결론을 냈음에도, 마지노선까지 미루고 싶어 1년 넘게 피임을 고집했더랬다.


그런데 막상 출산을 2주 남짓 남겨놓고 돌이켜보니, 임신 기간도 생각보다 재밌었던 거 같다. 덕분에 브런치도 시작했고, 운전도 배웠으며, 아기 용품의 무궁무진한 세계도 알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자칫 허무할 뻔한 작년 한 해동안, 뱃속에서 쑥쑥 자라준 아가는 위안 그 자체였다. 임신으로 내 인생이 더 좁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한 뼘 더 늘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잃은 것도 많았다. 불어나는 몸무게, 선명한 임신선, 늘어나는 튼살, 커지는 유륜, 아픈 골반, 약해지는 관절, 뭐 하나 피해가질 못했다. 친구들처럼 해외 취업을 알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고, 임신 기간 동안 업무 최전선에 서기 힘들었으며, 출산을 앞둔 탓에 좋은 이직 기회가 있었음에도 시도조차 해보기 어려웠다. 그럴 때면 친구들의 자유로운 삶이 부럽기도 했지만, 딱 탐나지 않을 정도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산전 우울증에 걸릴 거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감사한 일들이 더 많아지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만족할 줄이야. 미혼이나 딩크로 살았어도 행복했을 테지만, 겪지 않았으면 절대 몰랐을 임신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알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시답잖은 일로 투닥거리고, 커진 배와 함께 뒤뚱거리는 삶이, 내일 끼니 고민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하루가, 꽤나 근사했다.


그래서일까, 얼마 뒤 엄마가 될 나의 모습도 기대된다. 예전에는 엄마가 되어 잃을 것만 보였는데, 지금은 얻을 수 있는 것도 어렴풋이 보인다. 물론 출산은 너무 무섭고, 육아도 처음이라 자신 없지만, 그래도 든든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가와 함께할 생각에 설렌다. 이게 설레는 나 자신이 아직도 신기한 걸 보니, 아마 엄마가 되고 나서도 스스로가 오래도록 낯설 거 같다. 낯설 정도로 더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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