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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녀작가 Sep 04. 2024

어머니가 해준 천초묵

엄마작가

 ‘이럴 수가 아까워서 어떡해…….’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우뭇가사리묵을 샀다. 배송비가 아까워서 양을 조금 넉넉하게 주문했다. 막상 도착한 것을 보니 먹을 사람이 남편과 나뿐이라 빨리 다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두 통은 냉장고에, 세 통은 냉동실에 넣었다. 한 통을 저녁 밥상에 올렸다. 인터넷으로 처음 구매한 묵이라 맛이 어떨지 몰라 망설였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밤에 간식으로 한 통을 또 먹었다. 우리는 하루 만에 우뭇가사리묵 두 통을 먹어버렸다.

 

 냉동실에 얼려놓은 묵을 다 꺼냈다. 해동되자마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세상에! 얼음만 녹은 게 아니었다. 묵도 다 녹아내리고 있었다. 묵이 녹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내가 어릴 때 냉장고는 냉동실이 아주 작았다. 그 작은 냉동실에서 얼음을 많이 만들기 위해 어머니는 국대접에 물을 담아 냉동실에서 얼렸다. 그릇 모양의 큰 얼음이 녹는 모양은 마치 한쪽 살은 먹고 뼈가 덩그러니 보이는 생선 같았고 먹다 만 수박 같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우뭇가사리묵이 뼈만 남은 생선 같고 먹다 만 수박처럼 비실비실한 모습이다. 손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내려앉을 것처럼 탱글탱글함은 다 사라진 껍데기만 있다. 놀란 나는 나머지 통도 다 열어 보았다. 통마다 묵은 얼음처럼 녹아있었다. ‘묵사발’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묵을 담은 사발이 아닌 누군가에게 맞아서 엉망이 된 묵사발. 묵사발 난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는 여름만 되면 천초로 묵을 만들어주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해초인 우뭇가사리를 천초라고 불렀다. 그 묵을 곱게 썰어 콩국수처럼 콩물에 넣어 먹거나 오이냉국처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나는 콩물이나 냉국보다는 묵을 그냥 회처럼 큼직하게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먹으면 묵은 금방 사라진다. 언니들도 나처럼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해서 어머니는 한 번 만들 때 정말, 아주 많이 만들었다.


 더운 여름날 시골집 부엌에서 땀 흘리며 부지런히 천초를 삶고 또 삶았을 어머니. 천초묵을 먹지 못한 여름을 여러 해를 보내고 나니, 다시는 먹을 수 없는 그리운 음식이 되고 나니, 더운 여름 뜨거운 불 앞에서 흘렸을 어머니의 땀이 생각난다. 맛있는 묵 앞에 밀려나 버린 어머니. 그땐 왜 고맙다는 말을 못 했을까, 너무 당연하게 여긴 어머니의 마음. 내가 여름날 자식들을 위해 사골을 고아보니 알게 되었다.

 

 유난히 더운 올해, 매일 에어컨을 켜고 살다 보니 어머니가 해준 천초묵이 생각났다. 그것을 먹고 나면 더워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만드는 법을 배워놓을 걸, 후회가 밀려왔다. 직접 만들 자신은 없고 먹고는 싶고……. 나를 위해 천초묵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서럽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늙으면 자주 서러워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인터넷으로 우뭇가사리묵을 다시 주문한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사랑도 다시 주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진짜 먹고 싶은 것이 천초묵인지 어머니의 사랑인지. 주문도 하지 않은 서러움이 마음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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