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건지는 깨달음 하나 #22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기르는 개가 있습니다.
잘 길러져야 양떼의 보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떼를 잘 보호하는 개로 길러질 수 있을까요?
고전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개를 양떼의 보호자로 사육하는 양치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무섭고 수치스러운 일은 , 사육하고 있는 개가 무절제나 굶주림이나 그 밖의 나쁜 버릇으로 말미암아 양떼를 공격하며 대신 늑대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네.
-국가, 제3권, 416a, 플라톤-
이 문장을 읽는데 바로 저는 ‘엄마’의 역할이 생각났어요. 내가 혹시 잘 못 길러진 양 떼의 보호자인 개가 아니였을까? 양떼를 공격하는 늑대로 둔갑한 적은 없었을까? 정말 많았겠지요. 제대로 잘 길러진 양떼의 보호자로서의 개가 아닌 양떼를 공격하는 늑대처럼 행동한 적이 너무나 많았으니까요.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늑대로 살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내 자식에게 용서를 빌고 가해자가 아닌 보호자로 살아보겠다고 내 자녀에게 약속해 주고 싶습니다.
엄마 역할이 많이 없어진 지금에라도 회개하고 작은 역할이라도 가해자인 늑대로서의 삶이 아니라 보호자인 개의 역할을 하는 엄마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가해자인 늑대가 어떤 경우에도 되면 안 된다는 말이잖아요.
한 번의 실수로도 양떼들에겐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요. 목숨이 위태로우니까요.
우리는 우리 보호자들이 힘이 더 강하다고 해서 시민들에게 그런 짓을 못하도록 호의적인 협력자 대신 사나운 주인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으로 감사해야 하네. ~~~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닐까?
-국가, 제3권, 416b, 플라톤-
1.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적절한 교육이었네요.
교육을 받아야 이런 치명적인 실수(불상사)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하네요.
부모교육 강사로 살아가면서 제대로 부모로 살아가려면 부모교육이 꼭 선행되어야 함은 누구보다 절실히 느낍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내 자식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제대로 된 부모역할을 몰라서 아이에게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서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모르니까 치명적인데도 계속 그렇게 누적된 실수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부모로 살아가는 데는 무지하다는 것을
이대로는 좋은 부모로 살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정확히 인지하고
나의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면 되는 겁니다.
조금만 관심을 두면 부모로서의 나의 부족함을 메울 수 있는 공부의 기회는 넘치고 넘치니까요.
아무리 바빠도 이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하다면 어떤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부모교육 관련 공부를 먼저 하겠지요.
2. 올바른 교육(온유해지는 교육)을 받아야
적절한 교육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집어주고 있네요.
올바른 교육이어야 한다네요.
하지만 그들은 벌써 그런 교육을 받았어요.
여보게 글라우콘, 그것은 단언할 수가 없네.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잠시 전에 우리가 말한 대로,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도 그들의 보호자에게도 온유해지려면 그것이 어떤 것이건 올바른 교육을 받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일세.
-국가, 제3권, 416c, 플라톤-
부모역할 잘하려고 무조건 아무 교육이나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네요.
자기 자신에게도 온유해지고 자식들에게도 온유해지는 부모가 되는 교육을 받아야 했네요. 그래야 제대로 된 부모교육을 받은 거네요. 그것이 우리가 부모로서 받아야 하는 올바른 교육이었네요.
연장자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연장자 중에서도 최선자(最善者)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연장자란 경험이 많은 사람, 그 경험을 통하여 지혜가 길러진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선(善)하게 문제를 해결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하게 해결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좋은 해결책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원을 선택하는 문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문제에서도 지혜를 발휘할 것 투성이입니다.
일방적인 해결책으로 밀어붙이거나 명령, 강요나 경고, 위협은 선한 해결책이 절대 아닌 것이지요. 지혜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더 공부해 보고 더 고민해 보고, 스스로 해결되지 않으면 조언도 구해보고,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관련 책을 읽고 고민해 보고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선행 작업이 없다면 자주 아니면 항상 무섭고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며 내 자녀의 보호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보호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삶인 셈이지요. 이래야 연장자, 최선자가 될 수 있으니 내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부모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올바른 교육이 선행되어야 제대로 된 부모역할을 하며 지혜로운 부모로 살아진다는 것이니 연장자로 사는 삶, 최선자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부모로 사는 삶이 결코 만만치는 않은 일입니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
부모로서의 부담감이 아니라 이 엄중한 선한 책임감을 전수받은 경이로운 부모로서의 경험을 어떻게 살아내며 경험하고 계시는지요.
저는 저 자신부터 책임을 져 보기로 했어요.
‘나’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나를 부모로 살게 허락해 준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어디까지인가?
내 자식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았는지?
아이 스스로 자라도록 경험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그 역할을 부모인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지?
나를 먼저 더 정확이 알아야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겠더라고요.
지금도 나 자신에 대하여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나를 이해하기 위하여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나 자신에 대하여도
삶에 대하여도
세상에 대하여도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
끊임없이 공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생 학생으로 살아가는 게 제 꿈입니다.
나를 알아가는 공부가
내 자식을 이해하는 공부가 되고
세상의 변화를 알아가는 공부랑 연결되고
결국 우리를 알아가게 되는 공부였습니다.
그 공부를 통하여
먼저 나를 내가 잘 수호(보호)할 수 있고
내 자식을 잘 수호하는 선한 수호자로 살아가 수 있으니
더 확장된 우리의 수호자로도 살아갈 능력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니
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국가이니 말입니다.
가장 까다롭고 통치하기 힘든 국가입니다.
‘나’라는 국가부터 제대로 수호하고 싶습니다.
‘가정’이라는 좀 더 큰 국가는 자연스럽게 조화롭게 저절로 수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인 선한 양 떼를 잘 보호하는 선한 양치기 개로 평생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