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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5.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22)

제5장 | 조각정원 (5)

주원과 편가는 뛰어서 문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갔다. 왼쪽으로 꺾어진 계단 위편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두 사람이 계단을 다 올라가자 복도가 환했다. 천장에서 전등이 켜진 덕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입구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얼른 문을 나서서 거실로 나갔다. 현관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실 중간쯤 갔을 때 여자가 막 계단 중간을 꺾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손에는 라이플이 쥐어져 있었다. 망원조준경이 장착된 산탄 사냥총.

    레밍턴 모델 870. 2009년까지 생산. 무게 3.2~3.6kg, 길이 최대 128cm. 펌프액션 타입. 즉, 한 발씩 노리쇠를 당기는 것이 아니라 총신덮개를 뒤로 당겨서 탄피를 빼내고 다시 민 뒤 탄환을 장전하는 방식이다. 산탄총에서 많이 사용된다. 레밍턴 모델 870은 지금까지 1천만 정이 생산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라이플. 모스버그 500과 함께 펌프액션 산탄총 중에서 투 탑에 해당한다. 산탄총은 샷건이라고도 불리는데, 편가는 한때 사냥총 동호회를 따라다닌 적이 있어서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총알이 사람을 관통하지는 않지만 위력이 대단해서 근거리에서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유효사거리는 120m가량 된다. 총을 한번도 쏴보지 못한 초보자들이 사용하기 쉬워서, 미국에서는 홈 디펜스용으로 권총이나 다른 총기를 구입하지 말고 이 레밍턴 모델을 준비해 놓으라고 할 정도다.  



편가는 얼른 주원의 손을 잡아끌고서 주방 뒤쪽으로 도망갔다. 지하실 입구 앞쪽에 뒷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뒷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아까 지하실에 갈 때 얼핏 보아서 알고 있었다.

    편가가 안쪽 문을 잡아당겼다. 열렸다.

    두 번째 문에는 미국식으로 긴 도어락(door-lock) 가로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편가가 가로대를 밀어 열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면서 편가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실 쪽에서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편가는 주원의 손을 잡고서 뒷문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으로 뛰었다. 그곳에는 겨울 숲이 우거져 있었다. 비록 일부는 가지를 앙상하게 드러내 놓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막 숲 입구에 도착하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편가가 돌아다보니 여자가 총을 들고 겨누려 하고 있었다.

    편가는 황급히 주원을 숲으로 밀면서 그 위로 엎드렸다.

    그 순간 타앙!

    산탄총에서는 수십 개의 구슬이 튀어나오는 탓에 가까운 거리에서는 군용총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편가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니 총에 맞지 않은 것 같았다. 주원도 괜찮은 것 같았다.

    편가는 주원을 일으켜서 함께 앞으로 뛰었다. 바닥에 잎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빨리 달릴 수 없었다. 그래도 나무들 사이로 돌면서 정신없이 달려갔다.

    또다시 타앙!

    편가와 주원이 급히 주저앉았다. 편가가 뒤돌아보니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여자가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일부 보였다.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켰으나 최대한도로 허리를 숙인 채 앞으로 달려갔다. 나무가 많아 뛰어가는 데 방해가 되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추격자의 시야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편가는 주원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나무들 사이로 왔다갔다하며 꼭대기 쪽으로 달려올라갔다. 뒤에서는 뒤쫓아오는 듯한, 낙엽들을 어지럽게 밟는 급박한 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이 산꼭대기로 올라가면서 편가는 자주 뒤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렸지만 아직 적지 않은 잎이 남아 있고 또 일부는 상록수여서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뒤에서 쫓아오는 여자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땅에 떨어진 낙엽들이 걷는 데 소리를 많이 내서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편가가 갑자기 주원의 팔을 붙잡았다. 주원은 본능적으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느라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서 한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비탈로 뒹굴게 되었다. 다행히 곧 나무에 걸려서 멈추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주원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편가는 미끄러지듯이 주원 옆으로 갔다. 그리고 얼른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총소리가 탕! 하며 울렸다.

    주원은 얼굴이 새파래지며 손을 입으로 갖다댔다.

    옆에 있던 편가가 얼굴을 찡그리며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팔 위쪽을 붙잡는다.

    아―!

    편가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쓰러졌다.

    주원은 놀라서 편가 몸을 붙잡았다.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어떡해……?

    편가는 오른쪽 팔을 잡은 채 땅에 웅크리고 앉았다. 낮은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다.

    안 돼!

    주원의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팔을 뻗어 손으로 편가를 붙잡았다.

    그러자 편가가 고개를 흔든다.

    “나뭇가지에 찔렸어요.”

    편가가 속삭이듯이 말한다.

    주원은 맥이 탁 풀려 도로 주저앉았다.

    “어디 봐요. 많이 다쳤어요?”

    음―! 하며 편가가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신음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심호흡을 한다.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그러나 편가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여전히 많이 아픈 모양이다.

    “어디에요? 어디……?”

    편가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살며시 일어난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일어나요. 빨리 올라가야 돼요.”

    편가가 채근한다.

    


두 사람은 다시 몸을 일으켜서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기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낙엽 쌓인 땅을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잠시 올라가자 나뭇가지 사이로 산꼭대기가 보이는 듯했다. 그곳에도 나무가 많이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너무 위로 올라가면 밑에서 올려다보일지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위쪽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자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총의 개머리판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서 총구를 비스듬히 아래로 향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태도로 보아 두 사람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작은 체구의 여자가 그 순간만큼은 킹콩과 같이 거대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숨을 곳이 없었다. 자칫 움직였다가 소리라도 내면 그대로 발각된다.

    편가는 주원의 어깨를 눌렀다. 주원도 여자를 보았는지 순순히 주저앉는다. 최대한도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편가도 옆에서 살며시 주저앉으면서 여자 쪽을 살폈다.

    여자는 여전히 눈치채지는 못한 채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욱 몸을 낮췄다. 거의 땅에 주저앉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부스럭 소리라도 낼까 봐.

    편가가 주원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주원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머리를 숙였다. 깊숙이. 앞에 있는 나무 밑동에 닿을 정도로. 편가도 주원 옆으로 상체를 내밀며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살그락살그락. 여자가 조심조심 다가오는 소리. 여자도 최대한도로 조심하며 발을 내딛는 것 같았다.

    주원은 숨까지 멈추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초겨울 일산 북부의 겨울나무 무성한 조그만 언덕은 난데없는 광기의 서스펜스가 흐르고 있었다.

    극조심을 하며 한발 한발 내딛는, 초라하면서도 겁에 질리고 공포에 몰려 사고가 마비되어 가는 추레한 몰골의 추적자 여자. 그는 언덕 위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에 머리가 다치지 않게 몸을 낮추고 총구를 비스듬히 아래로 향한 채 여기저기로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면서 앞을 살피며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의 비탈진 곳 나무둥치 뒤에서는 공포에 잠긴 채 머리를 파묻고 있는 건장한 도피자 두 사람.

    갑자기 우주의 시간이 정지되었다. 심장의 박동도 멈추고, 호흡도 정지되고, 모든 사고도 그 순간 마비되었다.

    자박자박.

    온 우주에서 오직 그 소리만이 생명체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신호였다. 태초와 종말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인공적 유산. 그러나 그 소리에는 삶과 죽음이 들어 있다. 아니, 지금 이 현재의 순간에서는 둘 중 하나만이 존재해야 한다. 삶이 있으면 죽음은 존재할 수 없고, 죽음이 나타나면 삶은 실종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누구인가?

    운명? 실수? 인내?

    아니면 절대자?

    잔인한 운명, 찰나의 실수, 무한한 인내, 이들 중 어느 것이 승자를 결정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절대자의 의지가 이 순간을 지배하는 것일까?

    이것이 아니라면 고도의 집중력 유무가 생사를 좌우할 유일무이한 요소인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 순간을 지배하지 못했다.

    잘못된 판단, 오직 그것 하나가 흑백을 결정짓고 말았다.  

    여자가 저쪽으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극히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도망자 두 사람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문득 언덕 너머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라 동작이 빠를 테니 당연히 이 시각쯤에는 언덕을 넘어 비탈로 내려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판. 誤判. misjudgment. 误判, ごは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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