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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 Oct 23. 2021

매 순간 혹시라도 아기가 죽을까 봐






 육아를 하면서 가끔씩 심장이 쿵 바닥으로 내려앉을 때가 있다.


아기가 쇼파에서 떨어졌을때,

아기가 강아지의 응가를 먹었을 때,

아기가 분수토를 할 때,

아기가 자는데 숨을 잘 쉬는지 보려고 아무리 기다려도 배가 올라올지 않을 때,

아기가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을 때,

아기가 열이 나서 축 늘어질 때.


수도 없이 이놈의 부지런한 심장은 지구 내핵까지 끊임없이 순식간에 다녀온다. 학생때의 시험 직전 불안은 아주 아기자기한 긴장이었다. 그게 뭐라고 온몸에 무려 땀 까지 흘리며 심장이 겁나게 나댔을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분명 그때는 그 어느 순간보다 심각했을텐데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 조금 더 의연해지고 외제차도 아무렇지 않게 운전하고 남들이 하는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굳센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때와 분명 같은 심장인데도 가볍기 그지없다. 아니 그 역치가 심지어 더 낮아진 것 같기조차 하다. 그리고 나 자신의 불안보다 내 아기의 안전과 감정마저 함께 살펴야 하니 더욱 더 민감하고 예민해졌다. 불안한 내 유전자와 불안감에 다소 둔감한 배우자의 유전자가 만났지만 보통의 유전은 한쪽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으므로 적어도 여기에서는 내 쪽의 지분이 덜 섞여들어가기를 은연중에 빌고 또 빌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어떻게 늘 틀리지가 않는지.

임신 8개월때의 일이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그릇 거치대에서 그릇 하나가 떨어지려는 모습을 보고 있었고 귀찮아서 그냥 잡지 않았다. 모체인 나는 큰 소리가 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소리가 난 바로 직후 뱃속에 있던 아기가 놀랬나보다. 배 전체가 크게 한번 딸꾹질을 하듯이 움직였다. 청각이 가장 먼저, 그리고 출산 직전까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발달한다던데 아기는 뱃속에서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최초의 걱정은 그 날로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소리에 민감한 유전자를 올곶게 받았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서 육아하면서 점점 그 추측은 확신으로 선명하게 바뀌었다.

 아기는 크고 갑작스런 소리에 굉장히 민감하다. 박스테이프를 뜯는 소리, 위층에서 쿵쿵대는 소리, 덜커덩 거리는 다양한 생활소음 그리고 강아지가 짖는 소리. 민감한 청력을 타고 났다는 것을 알고 내 불안의 영역은 크게 나에게 닥쳐올 불안, 그리고 아기에게 올 불안으로 나뉘어져 더욱 자주, 강하게 오기 시작했다. 쉽게 불안해하는 성향만은 물려받지 않길 바랐는데 내가 늘 걱정했던 것이 마치 현실로 일어난 것 같아서 절망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아기가 어릴때는 이 점을 육아에 이용하기 쉬웠다. 이를테면 정체 모를 소리에 대해 이미 충분히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에 내 손을 뿌리치고 위험한 곳에 쉽게 가지 않아서 오히려 편했다. 결국은 내가 치우고 빨아야 하는 각종 더러운 것들, 지저분한 것들을 잘 손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이용했다. 아기에게 겁을 주고 그런 곳을 탐색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점이 오히려 아이를 더 예민하게 만든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됐다. 세대주는 그렇지 않지만 아이의 반은 내 유전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 브런치북을 쓰게 된 것도 아마 9할은 아이 때문일 것이다.







 아이가 내 불안을 모두 다 가져갔을수도 있고 일부만 가져갔을 수도 있고 그 중 참 많은 부분을 가져갔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 불안을 고쳐야 아기의 불안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에게 자주 쿵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 불안과 상처를 먼저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먹어졌다.







매 순간 (아기가 죽을까 봐) 불안한 육아불안장애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을 되뇌어야 나쁜 일이 닥쳤을 때 많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고사성어가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너무 힘들때는 그 누구의 위로보다 이런 말을 더욱 믿고 버텼다. 독박육아에서 의외로 가장 도움이 됐던 건 맘카페의 생면부지의 육아동지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의 이름모를 수많은 누군가의 엄마들, 그리고 주변에 지인들과 나이대가 비슷한 아기를 키우는 같은 육아맘의 신분(?)이 되면서 마치 육아라는 전쟁을 함께 치루는 전우들을 얻은 기분이었다. 원래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데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증 등의 심리적으로 불편하고 강력한 증상들을 경험하는 친구들이 참 많았다. 그들이 나와 친해져서 이런 이야기를 나와 나눠준건지(물론 나도 내 이야기를 했지만), 아니면 거의 모든 육아를 경험하는 엄마들은 이런 걱정을 달고 사는 건지, 아니면 수더분하고 동글동글 좋은 게 좋은거라고 생각하는 엄마들은 나와 맞지 않아서 점점 멀어진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의 육아불안은 이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이상하고 별난 것이 아니었다.




 SNS 계정에 육아를 하며 사소한 걱정부터 고민거리를 쓰면 공감이 순식간에 쌓이고 마치 본인들의 일인 양 물심양면으로 혜성과 같은 답변들이 실시간으로 쌓였다. 당장 아기가 아픈데 병원에 데려다 줄 수 없는 세대주, 내 몸이 부서질 것 같이 아픈데 아기를 대신 돌보아 줄 수 없는 나의 부모, 식재료를 사서 음식을 해야 하는데 음식을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환경. 현실은 지는 해의 그림자를 따라 생기는 쇠창살이 있는 섬과도 같은 감옥같은 집이었지만 온라인 세상에서는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나의 이런 불안에도 그들은 비웃지 않고 당연한거라고 따뜻하게 얘기해주는 것은 물론 빛과 같은 해결책을 늘 제시해주었다.




  아기가 매우 어릴때는 아기가 자고 있으면 30분 혹은 1시간 단위로 아기가 숨을 온전하기 잘 쉬는지, 영유아질식사 등의 생각도 하기 싫은 온갖 무섭고 불길한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지들 맘대로 안방마냥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녔다. 아기가 잘 숨을 쉬고 있는지 바이탈 체크 장치라도 늘 달아두고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기를 키운 적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하다못해 커피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는데 솜털같이 가볍고 부서질 것 같은 아기를 안고 계단이라도 올라갈라치면 머릿속으로는 온갖 무섭고 끔찍한 상상이 되었다. 온 몸의 근긴장도는 배로 올라갔다. 그러던 아기는 그래도 어느새 점점 단단해지고 커져서 마음을 점점 놓게 되었다.

 아기가 그때는 만 5개월을 거의 갓 넘겼을 때였다. 옛 직장 동료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해서 아기들이 동갑이었고 함께 오랜만에 만나서 식사를 하기로 했었다. 역시 사고는 정말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찰나로 일어난다. 서로의 아기를 바꿔 안고 있었고 이제 본인의 아기로 다시 되돌려 받기로 했다. 유아차는 식당 안으로 반입이 어려워서 나는 내 아기를 잠깐 내 옆의 의자에 눕혀두고 동료에게 아기를 안겨주었다. 그때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들었고 반사적으로 내 옆과 바닥을 보았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보통 이런 문장은 금은보화가 있거나 너무 좋을 때 쓰는 문장 아닌가. 아주 정확히 그 반대로 내가 늘 상상하던, 그렇지만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져있었다. 내 아기가 바닥에 널브러져서 비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얼른 아기를 안고 엉엉 울부짖었다. 거의 호흡곤란이 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우는 아기를 안고 짐승처럼 정신을 놓고 울었다. 세상이 끝나버린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아기를 보고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아기를 막 낳고 조리원에서부터 그런 상상은 수도 없이 했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놓쳐서 머리가 깨지는 상상. 아기를 안다가 잘 못 해서 바닥에 떨어지는 상상. 조리원 계단에서 놓쳐 아기의 피가 바닥에 버무려지는 상상. 내가 원해서 하는 상상은 아니었지만 너무 흔하게 그리고 매번 내 머릿속을 공격해왔던 일들 중 하나가 실재로 벌어졌던 것이다.



 그냥 악을 쓰고 울었다. 식당에 있떤 모든 사람들의 주의가 나에게 쏟아졌지만 그것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잘못되면 나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건 앞으로 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사람어른들의 말들이 내 귓가에 하나 둘 씩 꽂혔다.






“애기가 우니까 다행이야”

“이럴 때 애기엄마가 울면 안돼”

“엄마가 울면 아기가 더 놀라. 얼른 울음 그치고 병원가자. 괜찮을거야”

“아기가 운다는 건 크게 안 다쳤다는 뜻이야”

“아기가 어리면 삼신할미가 지켜주니까 괜찮을거야. 너무 걱정 말고 어서 병원에 가요”




 시간이 조금 지나니 손이고 발이고 어깨고 온몸이 벌벌벌 떨렸다. 그 와중에 아기는 쉬지 않고 너무나 고통스럽게 울었고 그 울음은 목이 쉬도록 그칠줄을 몰랐다. 낙상사고가 난 곳은 강남에서도 24시간 내내 교통체증이 끊이지 않는 곳. 내 생애 첫 앰뷸런스는 그렇게 탔다. 누군가가 감사하게도 119에 신고를 해주셨고 너무나 막히는 그 길은 그날따라 더욱 더 멀었다. 앰뷸런스에서도 계속 울었다. 구급대원분들이 뭐라고 말씀을 해주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 장면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기다렸다. 진료를 보고 난 후에 간단하게 x-ray만 찍기로 했다. 아기가 너무 어려서 CT는 권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동료에게 전화가 계속 왔지만 받을 기력이 없었다. 지갑만 들고 구급차를 탔기 때문에 가방이고 유아차고 모두 다 식당에 있었다. 아기를 안고 다시 식당으로 연결되는 육교를 건너면서 쉴 새 없이 빌고 또 빌었다. 하늘에게 부탁했고 아기에게 사과했다. 하늘에게는 아기가 큰 이상이 없게 해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리고 다시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며 눈치를 보다가 아기를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날도 내 아기가 우선이 아니고 동료의 아기를 우선으로 생각했기에 그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었다.  



 식당에 다시 도착해서 아기를 유아차에 눕혔다. 그런데 내 눈을 의심했다. 아기의 발 한쪽이 동그랗게 말려있었다. 마치 발레에서 나오는 ‘포인’ 동작을 하는 것처럼 단단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사실 평소에도 자주 그러고 있긴 했지만 그때는 다시 막 울면서 아기의 발을 폈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잘 펴지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만약 아기가 잘못되면 아기에게 필요한 조치를 최대한으로 취하고 내가 깔끔하게 세상에서 없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기는 어차피 세상에 태어난지 몇 개월밖에 되지도 않았으니 다시 임신을 할까 하는 쓰레기같은 생각도 했다가 다시 고쳐먹었다. 다시 아기를 낳아도 지금의 이 아기는 아닐거기 때문이다. 이미 엄마와 아기로 질긴 연을 맺은 이 아이와 도저히 이별을 할 자신이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픈 아기와 엄마를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 과도하게 감정이입을 해서 힘들었던 날도 많았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들의 얼굴에 해가 갈수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임신했을 때, 육아할 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혹시나 영향이 갔을까 그들 자신들을 때리고 또 때렸다. 나는 그런 모습을 늘 옆에서 하릴없이 지켜봐야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시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단지 본인의 업이라고 생각하고 아픈 아기를 위해 기꺼이 본인의 삶을 포기했다. 또래 아이들은 건강하게 뛰고 놀고 응석부릴 때 그들의 아이는 휠체어에 누워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눈만 굴리거나 ‘아’, ‘아’ 하면서 좋다 싫다의 단편적인 표현만 했다. 그래도 그 표현이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발전됐다고 느끼면 좋아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은연중에 임신과 출산에 대해 무서워했던 것 같다. 내 아기던 남의 아기던 아픈 아기를 보는 것은 가슴을 후벼판다. 그래서 만약 그런 일이 나에게 만약 벌어진다면 이 세상 등져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전부 다 내 부주의였고 내가 죽는 것만이 이 과오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만약 이 일로 잘못되서 죽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다행이라는 아주 쓰레기 같은 못된 생각도 했다. 평생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 보다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날 나는 내 인성의 바닥을 봤다. 지금은 글로 옮겨놓으니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오류가 없는 판단이 없다.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틀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정말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내가 없어짐으로써 모든 고통에서 이기적으로 벗어나려고 생각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너무 괴롭다. 정확한 날짜를 찾기 위해 사진을 찾아봤다. 오늘로부터 공교롭게도  2 전의 일이다. 2년이 지나고  날의 봉인되었던 감정을 처음으로 글로 옮긴 꼴이 되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너무 아프다.   만났던 동료는  사건 이후에  한번 아기가 괜찮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이후로는 어쩐지  봐지지 않는다. 내게는 아직도 너무 아픈 기억이다.


 한편,  사건 이후로부터 알게  통념적인 카더라 통신이 있다. 아기들은 기본적으로 몸이 안으로 말려있기 때문에 성인과 다르게 낙상을 해도 머리부터 떨어지는 일이 아주 잦지는 않다. 그날도 동료가 직접 목격했는데 머리부터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기한테  이상이 없었던  일수도 있을  같다. 그리고 아기가 떨어지자마자 의식을 잃거나(당연하겠지만), 토하거나 눈이 돌아가거나 쳐지거나 하면 나쁜 사인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그날 저녁에 아기는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아기의 웃음이 정말 감사하고 잠시나마 분리수거도 되지 않을 끔찍하고 더러운 생각을 했던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아주 드물게 웃으면서 발작하는 경우도 책에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때도 불안했지만 아닐거라고 생각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1주일을 보냈다. 예전에 재활병원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경직된 발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문제가  경우 편측으로  가능성보다 양쪽으로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다행히 발가락은 한쪽만 굽어졌었다. 지금도 아기가 발을 동그랗게 하며 걷거나 걷는 모습이 이상하면  가볍디 가벼운 심장은  바닥을  내려앉는다. 이제 적응  때도   같은데  감각은 얄궂게도  새롭다.








 아기는 고열이 자주 났다. 고열은 한번 시작하면 적어도 이 삼일은 갔다. 한 번은 40도 가까이 났고 설사를 하루에 10번 이상 했다. 아기는 가만히 앉혀놔도(잘 앉는 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폴더처럼 휙휙 접혔고 표정이 점점 없어지고 눈빛은 멍해졌다. 물론 머리는 이런 일로 아기가 곧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또 쓸데없이 부지런한 내 불안 스위치는 늘 이럴 때마다 내 몸의 어느 신체기관보다 가장 먼저 나서서 열일을 한다. 이 다음 단계는 뭐지, 예상되는 질환은 어떤 어떤 것들이 있지, 열이 안 떨어지면 어떡하지, 입원하면 언제 퇴원할 수 있지, 등등.


 한번은 아기가 8-9개월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얼굴도  알아  정도로 부종이 심했던 날이 있었다. 새벽에 아기가 우는데 오늘따라  이렇게 시끄럽지,  잠을 못자지 하면서도   아니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며 잠을 청했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분리수면을 하는 터라 바로 옆에서 아기 얼굴을 보면서   없어서 행했던 실수이기도 하다. 새벽 여섯시가 되어서 평소보다 너무 심하게 날카롭게 울길래 세대주가 결국 깨서 아기 방으로 갔고 그때 아기는 , 다리,    없이 붉은 발진이 온몸을 뒤덮었고 얼굴도 부어서 거의 원래의 아기 얼굴을 찾아볼   없을 정도로 상해있었다. 불과 5시간 전에만 해도 멀쩡했는데.


 제대로  진단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병원은 집에서 1시간 반정도 걸리기 때문에 급하게 세대주가 연차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아기는 분수토를 하고 더욱  울어재끼다 나중엔  힘이 없어서  늘어졌다. 너무 무섭고 겁이 났는데 피검사 결과상 백혈구 수치가 높고(정상수치의 다섯배 정도) 염증수치가 너무 높아서 입원을 해야한다고 하셨다. 마치 내가 이제까지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웃는 것처럼 이번이 진짜 고비라고 나를 압박하는  같았다. 혹시라도 백혈병일까봐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미친듯이 찾아봐야 했지만 갑자기 병원에 온 터라 충전기도 없어서 휴대폰은 꺼진 상태였다. 링겔을 어기저기 꼽고 겨우 열이 내려 잠이 자는 아기를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발 백혈병같은 나쁜 병은 아니길 기도하고 빌었다. 3 내내 항생제 몇 팩을  조그만 몸에 들이붓다시피 하고 나서야 겨우 열도 내리고 염증수치도 다시 내려갔다.




 하지만 아기가 이렇게 아픈거나 열이 나는 것은 모든 아기들이 적어도   번은 겪는 일이라 독단적으로 엄마인 나한테서는 온전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나의 인간성의 바닥과 불안장애가 콜라보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하게 학습했던 낙상사고는 지워지지 않았다. 얼마나 나쁜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안다. 내가 나를 속일수는 없다.


  

 

이 사건 이후로 더욱 더 나는 예민해지고 소심해지고 배타적이 됐다.

특히 육아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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