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면 왜 좋을까.
아무래도 아랫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온갖 번뇌가
몇만 피트 상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런 고민들이 하찮아지는 것을
(하찮다고 착각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닐까.
사실은 나도 몇달을 최저가만
미친듯이 찾아다녔으면서
비행기만이 가지고 있는 럭셔리한(하다고 느끼는)
소리마저 비싼 소음에
매료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보다 내가 실제로 결제한 금액이
버스보다 기차보다 케이티엑스보다
높으니까 그냥 그럴만 하다고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임신했을때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해외여행이었는데
턱 밑까지 차오른 만삭의 배를 하고서
공기청정기를 틀어놓고 여기는 몇피트 상공이며
현재 태평양을 건너서 엘에이공항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었다.
코로나 이후로부터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니
보상심리로 뷰가 좋은
(이라고 말하고 최대한의 높이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면 마운틴뷰 리버뷰
따위는 없어도 되는
호텔만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높은 층 호텔에서
비싼 호텔값에 포함되어있는
맛있어야 하는 조식을 일등으로 줄을서서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고 퉁퉁 부은 얼굴로
다시 객실로 올라와서 창밖을 보다보면
주황색 서울택시가 가장 많이 눈에 띄고
그 다음으로는 바쁘게 고군분투 하는 사람들
그리고 코로나 이후로는 시간을 막론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오토바이들이 눈에 띈다.
나도 이 호텔을 나가면
그 누구보다 개미처럼 열심히
빌빌거리면서 살아야 하면서도
잠깐은
그래 당신들은 열심히 일하시네요
나는 오늘 플렉스 한 값으로 좀 놀랍니다
하고
굉장히 역겨운 발상으로
그날의 지출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기내에서 보는 하늘은
그 가격 만큼이나 비싸고 예쁘고
고요하고 비싸고
타이항공 기내식은 생각보다
훌륭했지만
공짜로 주는 맥주만큼은 아니었다.
맥주는 옳다.
누가 주는 맥주는 더욱 더.
이 뜨거운 은박지를 벗기는
기분이야말로 짜릿하다.
손끝을 스치는 온도와 감촉이
다시금 느끼고 싶다.
왠지 모르게 지상의 것들보다
더 얇고 고실고실한게 손맛이 좋다.
지상에서 뜯다가 중간에 잘라지면
짜증날 것들이
기내에서니까 용서된다.
식사시간이 되면 저 멀리 다섯번째 앞에서
서빙하는 스튜어디스와 강렬하게 눈뽀뽀를
한다.
저를 스킵하지 말아주세요
진작 도착한 것 같았는데도
한참을 착륙을 안하더니
문득 창문을 봤더니
이게 그 유명한 그랜드캐년이구나!!!!
결국 그랜드 캐년은 예전부터 궁금하지도
가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돌덩이가 뭐라고 유명한지
뭐 위에서 보니까 멋지긴 하더니만
엘에이에서 5시간 버스를 타고
라스베가스에 가면서
간접적으로 접하게 됐다.
그랜드캐년을 가기 싫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한인 엘에이 혹은 미국 서부여행 코스에는 꼭 들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유산에 감동해서 인증샷을 올리는
그렇고 그런 동양인A 가 되고 싶지 않았던
지금 생각하면 약간은 재수없는 오만함
때문이었기도 했다.
입국심사는 살짝 빡샜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동양인 여성이
미국을 입국하게 되면
성매매 의심을 받거나
혹은 원정출산 가능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어디에서 머물 것이고
얼마나 머물 것이고
왜 왔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물어봤다.
또한 하필이면
입국심사 인터뷰때
기내에서 마셨던 맥주가 문제였는지
무지막지한 복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또한 친구집에서 머물 거라고 받았던 주소가 틀렸는데
엘에이 공항의 와이파이는 매우 불안정했고
그 친구와 연락도 할 수 없던 상황에
전화번호도 몰랐다.
한참동안 배도 아프고
긴 비행시간 탓에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한참을 설명하고
나는 정말 여기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고
내가 영어를 잘 하는 이유는
아주 예전에 미국에서 잠깐 살았기 때문이고
그때의 비자는 매우 깨끗한거라
아마 확인하실수 있을거라고
당신 나좀 들여보내달라..
내가 배가 하도 아파서 중간에
화장실도 한번 다녀오고
내가 비어를 많이 마셨다
등등의
갖은 설명으로 비로써 입국심사 탕탕이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탕탕 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받으면서도 복통이 너무 심해서
화장실을 들락날락 몇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래의 뻥 뚫린 높은 바닥의 틈이
여기가 미국이오
캘리포니아다 라고
인증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복통을 호소하는
나를 원정출산의
1인으로 생각했을까?
모를 일이다.
너 괜찮니
도움 필요하니
의사불러줄까 이랬거든
ㅎㅎ
근데 나중에 또 생각해보면
그깟 원정출산때문에 임신초기에
장시간 비행을 한다?
그것도 또한
모를 일이다.
그렇게 가치를 둘 만한 일인지.
역시 미국이라
엘에이 공항에는 영어밖에 없었고
(당연하지만)
막 내려서 찍은 야자수는 제주의 그것보다
훨씬 싱싱하고 훨씬 컸다.
본토의 토양을 머금은 것들이라
줄기마저도 굵직굵직
(이때는 사대주의에 굉장히 물들었을 때다)
뭐든지 봐도 멋져보이던
촌년의 미국행
내렸을때 밤이라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운치있었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옆자리에 앉았던
한국인 여행객분들의 차를 얻어타고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근처의 이름만 들어본
산타모니카 해변을 갈 수 있게 됐다.
캘리포니아는 아무래도 해변이니까
왜 새들에게 먹이를 주면 안되는지
꽤나 과학적으로 설명해놨다.
"새들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라고 딱딱하게 쓰여있는 표지판과는 사뭇 달랐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이들에게
미국 서부의 낙천적이지만
가식적인 무해한 느낌이 느껴져셔
다시금 반가웠다.
그 어디를 봐도 익숙하지 않은 건축물과 자재들
역시 여기는 미국이다.
한국이 아니었다.
반갑다 미쿡,
2주 동안의 짧지만은 않은 여행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라스베가스에 혼자 버스타고 간
한국여자 있나요?
게다가 그 옆에 흑인 남자가 초콜렛 베이비 만들자고
제안 받은 여자는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