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니까 더 까고 싶다.
나는 극중 송혜교 배우와 정지소 배우가
분한 문동은 처럼 가학적이거나 도를 넘는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다.
내가 실제로 폭력을 겪은 것은 아무리 세어봐도
손가락 다섯개를 넘지 않는다.
뭐,
아주 가벼운 성희롱,
이를테면 나의 컴플렉스였던
신체부위를 강조한 그림이 책상에 그려진다던지
너무나도 내가 시내에서 산 유행하던 빨간색 운동화임이,
내가 접어신었던 내 발 뒤꿈치 자국까지 선명한데
똑같은 것을 어제 샀다고 주장하는 가해자와
내 친구였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동조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속아 넘어가는 척을 해야 했던
상황이라던지.
회색 교복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두꺼운 목에 돌돌말린 회색 목도리를 반대 방향으로 삽시간에 풀어
반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휘두르며 맞았던
오징어 같던 회색 테슬 끝부분이 오른쪽 뺨을 스쳤을때 얼마나 아팠는지, 어느 부위에 상처가 났는지는
전혀 기억에 흔적도 없을 정도로 극히 경미했지만.
그 당시에 모두가 방관하며 숨죽이고 나와 가해자를 쳐다보던 30여개의 까만 눈동자들의 현재
행방은 궁금하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향하고 있을까,
아끼는 샤넬백을 향해 있을까.
어느 누구도 내 편을 들 수도, 들지도 못하는 상황,
적당히 애매한 동정과 경멸, 그리고 무시가
각각 다른 비율로 섞여있는 구린내나는 칵테일들은
지금 현재에도 어느 학교에도, 어느 직장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극중 문동은의 것과는 깊이와 강도를
비교할 수 없지만
드라마는 허구이고 내 기억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라는 것이
인정하기 힘들었나보다.
이 드라마를 보는 며칠동안 괜찮다고 생각했던 나의 학창시절의 여러 컷이 마음대로 조작되어 지속적으로
꿈으로 꾸어졌다.
어느때는 중학교 때 친구들이 같은 초등학교 같은 반이 되어 초등학생인 나를 괴롭히기도 했고
또 어느 컷은 고등학교 친구들이 단체로 나와서
현재의 내 삶의 근간에 대해 비난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곤욕이었던 것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각색되어 꿈에 나타나는
비난과 거절, 그리고 무시에 대한 끈덕진 테마를
가지고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지난주부터 내 카톡에 답이 없는
대학교때 친했고 현재도 꽤 자주 연락하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친구가
현재의 나의 삶에 대해 폄하하고 악질적인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제 3자의 눈으로 처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꿈까지 꿨더랬다.
왕따는 나쁘다.
이 간단한 명제를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꽤 여러번의 방관, 그리고 우연하게 공기처럼 몇 번 어쩔 수 없이 가해하기도 했던 나는 여러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완전히 원래 그랬던 것 처럼 사람을 등급을 나누고 문제삼을 수 없는 만큼 애매하게 까고
또 거기에 반응을 하면 그 반응이 재미있다고 까는 행위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섭고 힘들었고
동시에 흑백 네모 화면에서 이틀에 한번씩 구린 픽셀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지만 그것이 마치 강아지마냥되는 것처럼아끼고 키웠던 다마고치보다 몇백 배는 더자극적이었다.
마음 아프고 슬프고, 하지만 언제 끝날 지 몰라 아슬아슬했다. 왕따와 학교폭력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처음 시작한 자가 끝내야 한다.
말이든 행동이든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매우 드물고
아주 높은 확률로 피해자는 쉽게 갈아치워지고
가해자는 머릿수가 채워진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목적과 스탠스를 취하 있어 가만히 있으면 가해 쪽으로 매우 쉽게 휩쓸렸다.
마치 못된 유행을 따라하면 힙해지는 것 처럼.
도덕 교과서에서나 가끔 다뤄주면 이 세상에 있긴 있나 싶을 정도로 미세하고 연약하기만 한 실낱같은 죄책감을 행동으로 옮기기엔 리스크가 컸고 감정의 크기가 모래처럼 가볍고 하찮았다.
이 드라마는 중간이 없다.
사실은 신체적인 학교폭력은 법으로써 다스려져야 하고 타인의 신체에 해를 가했으면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너무 많이 간다.
문동은은 온 몸에 상처를 평생 가지고 가야하니 어쩔 수 없이 극중 보호자는 공석이다. 보호자가 있었다면 화상 상처에 적절한 처치를 받았을테니 극적인 전개를위해 빠졌을 것이다.
따라서 그 상처는 직관적으로 한국 드라마의 필수 요소인 로맨스에 불을 지핀다.
왕자님이 아니라
복수의) 칼춤을 함께 쳐 줄 망나니를 구하고 나서부터 복수의 그 날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가 타카총으로
딱 한대를 가격하는 순간 시즌1이 끝난다.
그러면 그렇지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OTT의 선두주자인 넷플릭스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시즌 1은 복수-beta버전이었다.
너무 슬픈건 가해자들은 문동은의 인생을 통째로 빼앗았다. 그리고 문동은은 복수를 위해 그의 인생을 통째로 건다. 가해자들에게 천천히 말라죽어보자는 무려 권유형을 쓴다. 먼저 가해한 이들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복수를 하면서 결국 자멸을 해야하는건가,
복수를 하고서도 더욱 잘 먹고 잘 살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지만 드라마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다루어준 덕에
6년 동안 가볍고 무거운 왕따를 겪었던
전직 왕따인 나는 오늘 상상한다.
나에게 왕따를 주도한 그 아이는 이 드라마를 봤을까?
아주 잠깐이라도 마음이 불편할까?
혹시나 외나무다리에서 만날까봐 하루나 이틀정도는 조금 신경쓰이는 하루를 보냈을까?
왕따행위를 방관한 수많은 동창생들은 한 두번이라도
그들이 보냈던 먹물같은 시선을 돌아볼까?
그들이 했던 차가운 말들에 대해서 다시 되새겨볼까?
아니면 나아가서
그들의 아이들이 비슷하거나 가볍게 당해오면
그들의 과거 행동을 잠깐이나마 생각하게 될까?
성인이 된 내가
회사를 차릴 때,
값비싼 명품 가방을 살 때,
외제차를 결제할 때
나는 그들을 생각했다.
이렇게 잘 살고 있는 나를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가장 큰 복수는 내가 가장 잘 사는 것이라는
하얀 클리쉐에 보기 좋게 속아넘어가서
결과적으로는 매우 잘 지내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어느 누군가를 따돌리고
그 따돌림을 방관했으며
때로는 내가 보냈던 화살처럼 다시 돌아와
따돌림을 당했다.
따돌림을 당하지도, 하지도, 방관하지도 않은 사람은
이세상에 없다.
이 글을 쓴 크나큰 계기는
남편의 장난스러운 물음이었다.
"전직 왕따가 본 이 드라마의 소감은 어때?"
답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조금은 아프다 이다.
왕따를 경험했던, 경험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의 간접경험이 될
훌륭한 드라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시즌 2에서는 더욱 더 악랄하고 잔인하게
그리고 끈덕지게
복수해주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세게 맞고
피도 더 많이 났으면 좋겠다.
드라마니까 가능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실현해주었으면 좋겠는
잔인하고 맺힌 마음이다.
수많은 문동은들의
젖은 베개와 함께한
수많은 악몽들이 아깝지 않게 말이다.
사진출처
2,3: 넷플릭스 홈페이지 및 스틸컷
1: 수동 목공용 손 타카총 타카건 락기능 포함 165x30x130mm : 하이우리마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