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지협 Feb 21. 2024

정월대보름을 맞이하는 자세

내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 밥상 사진

작년에 할머니가 쓰러지시기 전, 내가 카톡으로 받았던 할머니의 사진은 정월대보름날 몇 가지 나물반찬과 잡곡밥을 차려 드시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모처럼 할머니 집을 찾은 이모는 팔 연골이 다 닳은 할머니를 도와 나물 반찬과 잡곡밥을 차려드린 것 같았다. 


"할머니~ 모처럼 아주 맛있게 잡수셨겠네요!" 

"응, 그래. 너도 챙겨 먹어라~ 알긋제?"


몇 년 전부터 할머니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웃는 일이 없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분이셨는데... 도통 보기가 어려웠던 게 마음에 걸린다. 


나물반찬을 힘겹게 젓가락질하며 드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이다. 

할머니는 정월대보름날이 다가오면 일주일 전부터 매우 분주하셨다. 시장에 가서 여러 나물과 부럼, 생선 한 마리를 사야 했고, 잡곡밥을 짓기 위해 동네 슈퍼에서 청주와 잡곡쌀을 사다 챙겨 놓으셨었다. 


올 한 해 동안 귀 밝게
귀밝이 술도 마셔야 하고, 

이빨도 건강하게 해달라고
부럼도 깨 먹어야지! 

할머니는 정월대보름을 명절만큼이나 매우 챙기셨던 분이다. 밥도 어찌나 맛있게 지으시던지 재료에 아낌없이 껍질 깐 알밤을 여러 개 넣어 밥만 먹어도 배부른 영양식으로 챙겨주셨다. 생선도 굽고 나물도 5가지 정도 만들어 골고루 먹게끔 밥그릇 위에다 올려 주셨었다.   


설이 끝나기 무섭게 한숨 쉬려면 다가왔던 명절 같은 정월대보름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아주 큰 특별한 날이다. '명절도 아닌데 이렇게 챙기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시장에 따라가야 하는 귀찮음이 더 컷을 나이였다. 방안에 들어가 있는 나를 억지로 주방으로 불러내 손을 거들게 되는 상황으로 툴툴거리며 도왔던 일들도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 됐다.  (그때 내가 좀 더 관심 있게 할머니의 손맛을 기억하고 따라 했더라면... 할머니도 잊어버린 본인의 손맛을 내가 알려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해진 공식처럼 맛있게 밥상 차려주시는 할머니의 솜씨에 늘 금세 마음이 풀렸다. 푸짐하고 따스해서 추석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해 오던 날이었다. 내가 결혼하고도 할머니가 혼자 계실 때 역시 명절대보름날을 약식으로 보내실까 싶어 부럼을 대신할 견과류나 잡곡을 따로 보내드렸으니까... 



할머니 친구였던 영순이 할머니가 달집 태우기 행사에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할머니가 내게 권했던 날이 있었다. 나도 할머니도 비슷한 성향의 집순이라서 그냥 집에서 달이나 보자고 했다. 웬일로 달집 태우기 보러 가자던 할머니의 흔치 않은 권유였는데... 그때 갔더라면 달님이 소원을 잘 들어주셨을까? 


나는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면서 할머니만을 위해 홀로 묵묵히 해오던 일들을 손 놓게 됐다. 할머니가 계시던 집안을 한~두 달에 한 번씩 돌보며 생필품을 챙겼던 일, 어르신 학교로 불리는 센터에서의 보호자 노릇 등 할머니가 챙기던 일들을 옆에서 도와주는 비서노릇은 자동 해고된 셈이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나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까 싶은 책임감과 자부심 하나로 이어왔었는데 하루아침에 실직된 것처럼 마음이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할머니에게 무한 신뢰를 받던 직속 비서 같은 단짝 손녀역할은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지만 조금 번거로웠어도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었고 할머니의 따뜻하고 정성 어린 밥상을 먹을 수 있었던 게 얼마나 최고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2월이다. 


내가 잊고 지낸 일 중 하나가 바로 정월대보름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벌써 삼일 후에 정월대보름이길래 부랴부랴 뭘 준비해야 할지 마음이 분주해졌다. 시장을 가야 할지, 마트를 가야 할지, 온라인으로 주문을 해야 할지 온통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주일 전 발가락 염증의 발견으로 병원에 수시로 치료받으러 가야 하는 상황에서 집안일도 요리도 장 보는 것조차 쉽지 않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비빔밥이나 주문해 먹는 건 어떨까?' 그런 얕은수까지 쥐어 짜내고 있는데, '잡곡밥이라도 지어먹어야 하나? '그러고 있다.



할머니의 정성이 가득했던 정월대보름이 마음이 콕, 걸린다. 그리운 그때가 다시 떠올라 이렇게 몇 자 남겨본다. 


달님...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할머니... 이도 귀도 눈도 다리도... 아픈 데 하나 없게 해 주세요! 

 

#할머니생각 #할머니추억 #꽃할매 #꽃할매추억 #꽃할매인생일기 #조랑말손녀 #꽃할매용손녀말랑 #말랑작가 #손녀일기 #할머니생각 #정월대보름 #보름달 #정월대보름준비 #달집태우기 #정월대보름맞이 #할머니비서 #할머니단짝 #할머니빈자리 #잡곡밥 #오곡밥 #나물반찬 #부럼 #귀밝이술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와의 추억을 함께 나눈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