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소란
그것은 만연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다.
글쓴이. 해밀
약속한 만큼의 노동을 하고 약속한 만큼의 급여를 받기로 계약했던 첫 아르바이트는 대학 입시가 끝난 후 시작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계약서에는 근무 시작이 18시였지만 실제 출근 시간은 17시 50분 이전이어야 했다. 첫날 3시간 정도의 교육이 끝난 후 곧바로 근무를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1~2주 정도가 지났을 때 고용주가 첫 일주일은 교육 기간으로, 이후 3개월은 수습 기간으로 치고, 1년 기준 교육 기간 시급은 기존의 50%, 수습 기간 시급은 기존의 90%를 적용하겠다고 통보했다.
애초에 3~6개월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한 아르바이트였던지라 급히 지원 공고를 캡처한 후 고용주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고용주의 대답은 ‘원래 대부분 1년 근무를 기준으로 본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만두어라’였다. 지금까지 일한 만큼은 제대로 계산해서 줄 것을 요구했고, 그렇게 첫 아르바이트가 끝났다. 얼마 뒤 통장에 찍힌 급여에서 교육 기간의 시급은 여전히 기존의 절반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처음 겪었던 그간의 갑을관계에서의 언쟁이 떠올라 벌써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혹시 몰라 남겨두었던 증거 자료는 쓰지 못하고 이 정도라도 받은 게 어디냐며 스스로 단념했다.
이후에 새롭게 구한 작은 음식점 아르바이트에서는 다른 아르바이트생은 근무 시작 30분 전에 출근한다며 그를 당연하게 여겼고, 결국 제시간에 도착해도 혼이 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홀서빙 아르바이트로 채용되었지만, 곧 사근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같은 급여를 받으며 주방 설거지 및 보조 일을 하게 되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원치 않아도 고용주의 입을 통해 손님들의 사적인 얘기를 듣거나 무수한 혐오 발언을 들어야 했다.
이제는 준비 시간, 정리 시간, 초과 근무시간에 따른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반말은 애교 수준이 되었고 계약서만이라도 제대로 쓰는 고용주가 간절했다.
몇 안 되는 아르바이트 경력이 쌓여가다 보니 몸이 덜 고생하는, 손에 물을 안 묻힐 수 있고 공기가 꿉꿉하지 않은, 고용주의 눈치를 덜 볼 수 있고 조금 더 바라자면 화장실이 깨끗한, 그런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지킬 건 제대로 지키면서 복지가 좋은 곳이 대기업 프랜차이즈 매장 아르바이트라기에 이후에는 개인 매장은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일을 시작한 곳이 현재까지도 일하고 있는 백화점 내에 있는 핸드폰 관련 잡화 브랜드 매장이다. 하루 6시간, 주 2일, 오픈 아르바이트. 10시 30분 매장에 출근해 오픈 준비를 하고, 10시 50분 스피커에서 백화점 교육 때나 본 -나와는 별 상관이 없고 직급은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를 고용한 매니저보다도 높은- 사람이 숫자를 세는 소리가 나오면 반강제적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11시 매장 앞에 서서 약 3-4분 동안 백화점다운 클래식 오픈 음악에 맞춰 공손히 손을 모으고 매장에 들어오는 이들을 맞이한다. 그 후에는 혼자서 매장을 관리하며 케이스 등을 판매하고 재고를 관리한다.
처음 몇 주간은 오전에는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다 점심시간 이후 손님이 북적이면 다음 타임이 올 때까지 정신없이 일하는 평범한 아르바이트였다. 매장 특성상 어떠한 보호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깨진 스마트폰 보호 유리를 만져야 했지만, 앞서 언급한 나의 작은 바람들을 충족해주는 -근로계약서는 작성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름 마음에 드는 일자리였다.
그러다 본격적인 코로나 19가 시작되고 백화점에서 매니저로, 매니저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주일에도 몇 번씩 증상 의심자, 해외 여행자는 신고하라는 메시지가 전달됐고, 곧 매장 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으나 마스크는 제공되지 않았다. 나는 사비를 들여 KF94 마스크를 몇 장 더 구해야 했다.
고용 당시 나에게 최소 6개월은 근무할 것을 요구한 매니저는 내가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갔을 무렵 아르바이트생들을 모아놓은 단체방에서 당장 이번 달 급여부터 작년 최저시급을 적용할 것을 통보했다. 코로나 19로 인한 매출 급감으로 사정이 안 좋아졌음을 강조하던 매니저는 어떠한 사과도 없이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이해를 강요했다. 정신없는 퇴근길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조금 벙쪄 있었지만 이내 ‘내 월급, 제대로 받아보기도 전에 깎일 수는 없다’라는 생각에 매출이 오르면 미지급됐던 급여를 보상할 것이냐 물었다. 매니저는 개인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그건 힘들다, 요즘 매출이 작년 대비 얼마나 감소했다, 이해 바란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왜 피해를 아르바이트생에게 지우려 하는지, 어떻게 사과 한마디 없이 이해를 바라는 건지. 결국,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노동청에 신고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전했고 매니저는 역시 ‘이대로는 너와 같이 일할 수 없다’ 말했다. 이번에는 행여 잘리게 되면 즉시 근로계약서 미작성과 부당해고로 신고하자 마음먹은 상태였기에 큰 아쉬움은 없었으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새로운 아르바이트생 고용이 어렵던 매니저는 이미 교육까지 모두 마친 내게 일을 맡기는 것이 편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급여를 지급할 것을 약속하고 내게 계속해서 일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나 역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게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일을 계속해서 하기로 했다. 어쨌든 급여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한 달 생활이 급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문제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20대 대학생이다. 나는 절대적 약자가 아니고, 내가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은 더더욱 아니며, 그렇다고 나를 부당하게 대우했던 고용주들이 특별히 나빴던 것도 아니다. 물론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멈추었다고 해서,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저지른 부당한 대우가 없던 일이 되고 정당 해지는 것일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내가 겪은 모든 부당한 대우는 내가 멈추었어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어도, 개인의 투쟁 후에 바뀐 점이 없더라도 분명히 내가 겪은, 내가 피해를 받은, 노동권 침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정당한 지급을 대가로 노동을 행하는 우리가 노동자이고, 우리 중 대부분이 노동권 침해를 겪는다. 그것은 만연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다. 뒤엎을 수는 없을지언정 짚어는 봐야지 않을까. 노동권 침해는 당연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