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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믄 Oct 13. 2021

너를 습관처럼 생각하고 싶지 않아

4년 간 매일 생각하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4년이나 만나온 남자친구와 한 달 전 헤어졌다.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남자친구였고, 좋은 남편감이었다. 이혼 가정의 자녀답게 결혼이라는 제도에 회의적이었던 나조차도 이런 남자와 결혼한다면 평생 행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4년을 만나오는 동안 싸움이라고 할 만한 사건도 크게 없었을뿐더러, 이런 것도 싸움으로 치나? 싶은 걸 합쳐도 한 손으로 꼽고도 남았다. 누구보다 헌신적인 연인이었으며,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삶에서 역경이 닥칠 때마다 그 앨 떠올렸고, 그 자리에 그가 한결같이 존재함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주 주말에 내가 나가 살 집을 보러 가기로 했었고, 그 전 주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우리 엄마가 차라리 같이 살 집을 찾으라는데, 어때?" 하고 물었으며, 나는 "그것도 좋아!"라고 답했다. 그리곤 금요일 밤에서 새벽 사이, 공원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그 완벽한 남자친구가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황당했다. 처음 몇 시간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현실 감각이 돌아오고 나서는 그저 끝없이 물었다. 이유를 묻고, 시기를 묻고, 원인을 묻고, 가능성을 묻고, 대안을 물었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매달렸다. 내가 잘할게, 미안해, 다시 생각해보면 안 돼? 지친 나는 백 번을 망설인 끝에 결국 물었다. "이제 진짜 나 안 사랑해?"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매달렸다. 안 사랑해도 돼, 좋아하기만 해도 돼, 아니, 좋아하지 않아도 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정말 잘할게, 응? 나는 이런 순간엔 자존심 같은 건 하등 쓸모없다는 걸 알았다. 최선을 다해 울다가, 웃다가, 이렇게 구슬렸다가, 저렇게 빌었다. 4년이나 한결같은 태도였던 그는 처음으로 나를 두고도 강경했다.


결국 나를 납득하게 만든 건 이젠 더 이상 예전만큼 내가 좋지 않다는 말이었다. 내가 가진 어떤 논리도 무력화하는 말. 나는 그 말을 바로 이해했다. 공원에서 우리 집까지 운전해오는 길에 농담 따먹기를 해가며 몇 번인가 더 붙잡고, 집 앞에서도 이대론 못 간다며 몇 시간인가 더 울며 매달렸지만, 이제는 나에게 잡혀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우린 평소처럼 공동현관 앞에 서서 서로를 한참 바라보다, 이제 진짜 간다며 발을 뗐다. 또 평소처럼 내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새벽부터 하루를 꼬박 울었다. 그리곤 그가 사준 운동화를 신고 공원으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공원. 여태까지는 단 한 번도 운동하러 가본 적이 없는 곳.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결혼할 줄 알았던 남자친구가 이별을 고한 곳. 펑펑 울 작정으로 근처 편의점에 들러 생수며 물티슈까지 야무지게 챙겨 들고 갔는데, 생각보다는 슬프지 않았다. 그저 길고 긴 트랙을 많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갈 뿐이었다. 러닝이든 걷기든 혼자 하는 운동이라는 점이 좋았다. 내가 하염없이 걷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침 3일 연휴여서 내리 걸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공허해질라 치면 얼른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걷고 또 걸었다. 걷고 있을 때는 슬픈 생각이 나도 괜찮았다. 내가 멀티가 되지 않는 사람이어서인지 일단 걷고 있는 중에는 금방 슬픔이 멎었다. 그러니 나의 잘못을 생각하고, 우리의 이별을 생각하고, 지난 추억을 곱씹으면서 계속 계속 걷기만 했다. 하루 두 시간씩 걸으며 정리한 생각들은 나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바쁜 회사 생활로 돌아가니 슬픔 같은 건 사치였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왁자지껄한 쉐어하우스 특유의 분위기에 융화됐다. 난 너무나 잘 괜찮아지고 있었고, 또 공허함이 들이닥칠 땐 공원으로 향하면 그만이었다.


걷는 빈도가 줄었다. 앞으로 다가올 한 달 반, 모든 토요일과 일요일이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예정되어있었다. 특히 그동안 배워보고 싶던 모든 것들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도예며, 보드며, 드럼이며, 피티까지 한 번에 등록했는데, 그중 첫 번째 순서가 보드였다. 자전거도 탈 줄 모르는 내가 스케이트 보드를 탄다니 주변에서는 그저 만류하기 바빴다. 원래 일단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타입이기도 하지만, 매주 보드를 타는 친한 동기 왈 나도 탄다면 너도 백 퍼센트 탈 수 있다기에 그 말을 듣기로 했다. 꽉꽉 채워둔 첫 번째 주말은 날씨가 무척 좋았고, 동기 말이 기분 좋게 맞았다. 덥고 힘들어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내내 웃었다. 내가 보드를 타는 건 기적 같았고,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타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도 스토리를 올렸다. 보드 존잼! 이라고.


만족스러운 업로드 절차를 마치고 30초 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보드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뚝 소리를 들었다. 왼쪽 발목, 고3 때도 같은 쪽 발목을 다쳤었다. 그땐 인대가 파열돼서 두 달을 반깁스 신세를 졌다. 심지어 수능장에도 절뚝이며 들어갔을 정도였다. 인생에서 가장 우울할 때마다 오는 징크스 같은 걸까? 다들 뜯어말리는데 보드를 타러 온 나처럼 고집스럽게도 또 왼쪽 발목이었다. 추석 연휴를 앞둔 토요일이어서 문을 연 병원이 없었다. 하필이면 보드 수업이 거의 다 끝나갈 때 다친 거여서 그나마 문을 열었던 곳도 다 닫은 뒤였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겨우 병원을 찾았다. 90년대에 개원한 이후 단 한 번도 변화가 없었을 것 같은 곳. 그곳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인대가 늘어났다는 이야기와 함께 주사를 6방 정도 맞은 뒤 절뚝이며 집에 돌아왔다.


걸을 수가 없었다. 들어차 있던 약속은 자연스레 다 취소됐다. 새로운 정보와 경험으로 채우던 시간이 텅텅 비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침대에 정자세로 누워 4년 동안 들여놓은 습관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머릿속이 구남친으로 가득 찼다. 한 달 전이었으면 징징대는 카톡을 보냈을 거였다. 추석이니까 수원 내려가야 하는데 택시 타고 가야 하나? 하고, 내심 당연히 데리러 올 거라는 말을 기대하면서. 그 앤 연휴가 끝나고도 계속 수원에 있으면서 재택을 하라고 했을 거다. 난 그게 맘대로 되는 게 아냐, 팀장님한테 물어봐야지 했겠지. 그 사이 날 집 앞에 데려다준 걸로는 부족해서 내 수많은 짐들을 짊어지곤 7층 현관 앞까지 내려다 놨을 거다. 4년이나 학습된 연인은 지금 내 옆에 없는데도 이렇게 습관처럼 따라다닌다. 걷기로 공허함을 상쇄시킬 수 없으니 꼼짝없이 누워 생각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원은 택시를 타고 갔다. 엄마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가지 말까도 싶었는데, 언제까지 집에 안 갈 수도 없겠다 싶었다. 엄마는 우리 셋 밖에 없는 명절에도 동네잔치하듯 음식을 준비했다. 몇 종류나 되는 전에, 갈비찜에, 닭갈비에, 조기찜에, 혹시 부족할까 삼겹살까지 구비해두었다. 난 다리를 다쳤다는 핑계로 상전처럼 누워 온갖 콘텐츠로 뇌를 마비시켰다. 커뮤니티며 틱톡, 유튜브, 웹툰을 끊임없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 집에서 온 가족 앞에 대성통곡하지 않고 무사히 명절을 마치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욱여넣은 콘텐츠들이 소화가 안 됐는지 영 식욕이 없었다. 이번 추석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입맛이 없어"였다. 엄마가 갓 구운 전을 예쁘게 접시에 담아 건네면 두 개를 겨우 먹었다. 그리곤 입맛이 없다며 방에 들어가 울었다. 갈비찜으로 거하게 한상 차려줄 때도 한 술을 겨우 떴다. 그리곤 또 입맛이 없어 이따 먹겠다며 방에 들어가 울었다.


다행히 엄마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동안 왜 자기 방은 없냐며 툴툴대던 동생은 2층에 올라가지 못하는 나 대신 내 방을 차지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실컷 울었다. 혼자 남겨진 슬픔에 공허해서 울고, 20년 넘게 혼자 잘 살아놓고 고작 4년 때문에 숨 쉬기 힘든 내가 너무 답답해서 울었다. 그 와중에 일은 계속해야 해서 엉엉 울며 노트북을 두드리는데, 헤어지자고 말하던 순간에도 모니터링 안 해도 되냐며 묻던 그 애가 떠올라서 그때와 똑같이 무릎 위에 노트북을 두고 또 울었다.


문득 억울했다. 분노는 다 사그라든 줄 알았는데 화까지 났다. 4년을 만나 놓고, 그렇게 날 사랑해놓고, 그만 만나자고 얘기할 때도 나보다 더 많이 울었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보자고 한 건 너였잖아, 그런데 왜? 어떻게 나한테 이래? 2주 만에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게 말이 돼? 눈앞에 두 사람이 찍은 셀카가 떠다녔다. 나랑은 저런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적이 없던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숨 쉬기가 어려워서 뭐든 해야 했다.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어차피 날 차단했을 테니까 안 보겠지 싶기도 했다. 낯설게 느껴져도 내가 알던 걔라면 차단 문자함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모를 테니까.


긴 연휴 기간이었지만 엄마 앞에서 질질 짜는 일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택시를 탔고, 내 어깨와 두 팔로 짐을 짊어지고 올라왔다. 사람과 소음 가득한 쉐어하우스로 돌아왔지만 습관은 여전했다. 엄마가 싸준 음식들을 정리하면서 울고, 하우스메이트들과 대화하다 뒤돌아 울고, 하여간 내 눈앞에 사람만 없으면 눈물바람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내가 겪는 건 고통 그 자체였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에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젠 걜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끝없이 눈물 흘리는 것까지 습관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2주 정도 지나니 또 평온해졌다. 다시 그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어졌다. 난 회사 생활할 때도 2주 단위로 일이 좋았다가 하기 싫어졌다 하는데, 후폭풍도 같은 패턴이라는 게 웃겼다. 아직 제대로 걸을 수 없는 것도 똑같고, 또 3일이나 되는 연휴가 생겼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하루아침에 마법처럼 괜찮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원래 회복탄력성이 좋긴 한데, 이럴 수도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의문이 꼬리를 물기는 해도 어쨌든 평정을 찾았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걔 생각을 한다.


습관을 만드는 데는 66일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습관을 지우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항간에는 농담처럼 이런 룰이 있다는데, 1년 사귀었으면 연애를 1달 쉬어야, 2년 사귀었으면 연애를 2달은 쉬어야 한다는 것. 이 기간을 지키는 게 전 연인에 대한 예의라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이전의 습관을 지우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난 4개월을 버티면 될까? 나의 전 남자친구는 습관을 새로운 습관으로 덮는 전략을 선택한 듯하다. 아직 66일이 지나지 않은 지금, 몇 겹이나 덧칠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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