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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믄 Oct 13. 2021

섬을 꿈꾸는 건 자유

첫번째 주제 : 섬

중학교 때까진 영어 학원에 다녔다. 공부를 위한 학원은 아니고, 한두 시간 정도 원어민과 떠들다가 오는 그런 학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둥글게 앉아 그 주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냥 주말에 있었던 사소한 일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날은 왜인지 결혼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너도 결혼이 하고 싶니? 난 단칼에 말했다. 결혼식은 하고 싶은데 결혼생활은 하기 싫어요.


어렸을 때부터 난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엄마가 정의하는 대로 정의하던 때라, 넌 이기적이어서 결혼이랑은 안 맞는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내재화된 믿음은 날 비혼주의자로 만들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난 절대 안 할 거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런 말 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가더라, 라는 뻔한 레퍼토리에는 왜 어릴 적부터 가져온 내 신념을 무시하냐며 응수했다. 마침 20대 초반쯤 들어서서는 비혼이라는 단어가 유행했고, 그때부턴 내 비혼식에 와줄 거지? 하는 게 내 레퍼토리가 됐다.


그럼에도 나는 결혼식을 꿈꿨다. 결혼 상대는 누군지도 몰랐다. 그냥 때로는 야외에서, 어떤 날은 길고 긴 식장에서, 가장 최근엔 한옥에서의 그날을 상상했다. 결혼식 테마며, 음악이며, 누굴 초대할지까지 머릿속으로 한바탕 정리하고 나면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태생이 관종이라 그런지 내가 주인공인 날이 온다는 생각만으로 신났다. 그래도 상상은 거기서 끝. 상상 속에서 결혼식은 끝나지 않았고, 영원히 그날에 멈춰있다. 결혼식이 끝나지 않으니 당연히 결혼생활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를 꿈꿨다. 엄마 곁을 떠나 살면서 내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솔직히 결혼은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아이는 낳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들이 들으면 웃긴 이유 하나로 아이가 갖고 싶었다. 사회에 공헌하는 인류를 만들고 싶었다. 난 이 세상이 정말 싫어, 우리 세대는 글러먹었어, 어쩌면 내가 더 나은 인류를 세상에 내보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이 허무맹랑한 생각 하나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난 낳는 게 싫은 거지 키우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이름은 섬으로 지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다. 그냥 섬. 푸르고 광활한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섬. 시간이 지나도 그저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섬. 파도가 치든 태풍이 불든, 매일 조금씩 깎이고 깎이더라도 그곳에 있을 섬. 그런 섬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우리나라에선 남자 성을 따라야 할 테니 내 성을 이름에 같이 넣고 싶었다. 그럼 윤섬이 될 텐데, 평생을 이름 덕에 수고스러워질 게 눈에 선했다. 김윤섬이야. 아니, 섭이 아니라 섬. 근데 그냥 섬이라고 불러줘, 그게 내 진짜 이름이야. 윤은 우리 엄마 성인데...  그래도 이런 불편함이 존재감이 되지 않을까? 난 별명도 붙이기 힘든 흔한 이름으로 살았으니까 그런 게 부러웠다.


어쩌면 내가 결혼식을 꿈꾸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선지 모른다. 나라면 남들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나라면 어딘가에서 완벽한 짝을 찾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완벽이라고 하면, 결혼할 생각이 없던 나조차도 결혼할 결심을 서게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내가 낳지 않을 섬을 함께 꿈꿔줄 사람. 유니콘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뼈아프게 경험했으면서도 독하게 자신감에 찬다. 왜 착하게만 살면 안 돼? 모두 좋은 사람일 수는 없는 거야? 한 사람과 영원할 수 있으면 좋은 거잖아, 왜 선의를 믿으면 안 되는데? 그냥 곧이곧대로 보이는 대로 살 수는 없어?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 하나쯤 만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 한 명쯤 더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그런 포부.


포부가 너무 거창한 나머지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어서 시작조차 못할 수도 있다. 인류애는 허상, 사랑은 망상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섬을 꿈꾼다. 배신당하고 또 배신당해도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 회사에선 내가 가진 '그릿'이 장점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적당한 때에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한 번 실패해놓고 똑같은 걸 계속하는 건 학습능력이 없는 거라고. 나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나는 학습능력 없는 낭만주의자가 되고 싶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해도 적당히 타협하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어딘가에 나랑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한 명은 있을 거라고, 그리고 꼭 그 사람을 찾아낼 거라고 믿고 싶다. 내가 사는 쉐어하우스의 주인 언니가 그랬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네 명쯤은 더 있을 거란 생각으로 이 집을 열었다고. 주변에선 그런 사람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우린 이곳에서 만나 너무나 잘 살고 있고, 빈자리가 생기더라도 금방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채워질 것을 안다. 그러니까... 근데 뭐 사실 그런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긴 하다. 꿈꾸는 건 내 자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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