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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믄 Oct 22. 2021

4년 전에 네가 보낸 메시지.... 지금 봤어

메시지를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몇 시간을 뒤척이다 결국 포기하곤 핸드폰 불빛으로 눈을 혹사시키기로 했다. 이유도 없이 문득, 요즘 애들은 페이스북 메시지로 소통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혹시 내 메신저에도?'라는 생각을 했지만, 앱을 다운로드 받아야만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안내에 빨갛게 떠있는 알림 표시를 몇 년이나 방치했다. 그날 밤은 정말 할 일이 없었고, 메시지함엔 놀라우리만큼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시시하다고 생각하면서 앱을 끄려는데, 좌측 상단에 또 빨간 알림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 나의 구구남친, 그러니까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 이전에 만났던, 6년 전에 2년을 만난 그 남자의 절절한 메시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이 메시지를 이제야 발견한 건 필연이었다. 앱 다운로드라는 장벽이 높기도 했지만, 구남친과의 연애가 지나치게 행복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하루는 달디 단 연애로 꽉 채워져 불면의 밤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메시지에도 그렇게 적혀있었다. 좋아 보인다, 남자친구 잘 만났네, 만나는 사람 있다고 진작 말해주지 그랬냐, 너 때문에 난 너무 힘들어... 얘랑은 헤어지고도 계속 연락하면서 몇 번 만났던 게 떠올랐다.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그때 요즘 만나는 여자 없냐, 누구 만나면 꼭 말해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 같다. 2017년에서 2018년을 걸쳐 쌓여온 이 메시지들은 한 달 전, 내가 배신감과 분노에 차 눈물을 펑펑 흘리며 구남친에게 보낸 문자와 같은 말. 단지 그 말들을 다른 표현으로 바꾼 것뿐이었다. 이런 게 바로 업보인가? 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업보를 몇 개나 만났을까? 나의 구남친도 4년쯤 뒤에나 그 문자를 발견할지 모른다.


돌고 도는 건 업보만이 아니다. 새로운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구남친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었다. 걔랑 난 너무 닮았고, 또 너무 오랜 시간 같이 붙어있었으니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서있는 게 잘 상상이 안 됐다. 그래도 어떤 연애를 할지는 눈에 선했다. 야외 데이트 땐 추울까 봐 담요를 챙겨 오고, 비싼 전자기기를 사주고, 도시락을 싸다 회사까지 배달해주고, 집 앞 초밥집에서 연어초밥을 포장해오겠지. 내 예상은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상상이 아니라 경험이었으니까. 연애도 돈다는 걸 그 두 사람이 말해주고 있었다. 가끔은 정답을 알고 싶지 않은 문제도 있는 법인데, 자꾸 나에게 흔적을 남기는 연인 때문에 결국 답지를 찾으러 가고 말았다. 내가 딱 하나 틀렸던 건, 내 옆자리가 아니어도 걔가 그 자리에 어울릴 수 있다는 것.


돌고 도는  연애만이 아니다. 구남친과 사귄  얼마 되지 않았을 , 그의 구여친에게 연락이 왔었다는 걸 알았다.  연락을 단호하게 끊어냈다는 것까지 알아서, 헤어진  얼마 되지 않았어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냥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다. 헤어진    받아들이지? 구남친과 헤어지고    만났을   얘길 했었다. 너랑 헤어지면  저렇게 끊어내겠구나, 했었다고.  웃으며 말했었다.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지도 않았어. 연애가 도니 이별도 돈다. 그땐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젠  사람도 내가 미웠겠구나 싶다. 내가 미워해야 하는  구남친뿐인데, 애꿎은 타인을 미워하게 만든  걔가  가장  잘못일 거다. 구여친과  사이에는 3개월 정도의 기간이 있었다. 나와 현여친 사이엔 2주는 있었을까? 짧아진 기간만큼 나에게  미안해 헤어짐에 조금  신경 써준 걸지도 모른다.


업보와 연애, 그리고 이별은 돌고 돈다. 다만 반복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연애일 뿐이다. 나에게 이별을 통보하기 2주 전인가, 구남친은 나를 집에 데려다 주곤 온 동네를 뒤져가며 내가 당시 꽂혀있던 과자를 한 아름 구해다 주고 돌아갔다. 파는 곳이 많이 없어서 근처 편의점엔 모두 들렀으며, 마셔보고 싶다고 했던 죠리퐁 막걸리는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못 사 왔다고 했다. 난 그게 사랑인 줄로만 알아서 헤어짐의 순간에도 이날을 떠올렸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잘해줬어? 걘 잘해준 게 아니라고 했다. 그냥 최선을 다한 거라고.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계속 미련을 뒀다. 이제는 구남친이 최선을 다한 건 연애였으며, 사랑은 아니었다는 걸 알만큼 시간이 지났다.


무엇이든 다시 할 땐 이전보다 잘할 수밖에 없다. 구남친은 나와의 연애를 인사이트 삼아 조금 더 나아진 연애를 하고 있겠지. 구남친과 헤어지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내가 이전에 만나본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거였다. 걜 만나기 전 한 번이라도 더 연애와 이별을 경험했다면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나의 다음 연애가 기대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4년 간 충실히 쌓아 올린 연애 경험이 다음 남자친구와의 연애에 최선을 다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남친이 새로운 사람과 나와의 연애를 반복하는 게 싫지만은 않다. 어쨌든 나와의 경험이 좋았다는 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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