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몇 시간을 뒤척이다 결국 포기하곤 핸드폰 불빛으로 눈을 혹사시키기로 했다. 이유도 없이 문득, 요즘 애들은 페이스북 메시지로 소통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혹시 내 메신저에도?'라는 생각을 했지만, 앱을 다운로드 받아야만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안내에 빨갛게 떠있는 알림 표시를 몇 년이나 방치했다. 그날 밤은 정말 할 일이 없었고, 메시지함엔 놀라우리만큼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시시하다고 생각하면서 앱을 끄려는데, 좌측 상단에 또 빨간 알림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 나의 구구남친, 그러니까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 이전에 만났던, 6년 전에 2년을 만난 그 남자의 절절한 메시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이 메시지를 이제야 발견한 건 필연이었다. 앱 다운로드라는 장벽이 높기도 했지만, 구남친과의 연애가 지나치게 행복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하루는 달디 단 연애로 꽉 채워져 불면의 밤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메시지에도 그렇게 적혀있었다. 좋아 보인다, 남자친구 잘 만났네, 만나는 사람 있다고 진작 말해주지 그랬냐, 너 때문에 난 너무 힘들어... 얘랑은 헤어지고도 계속 연락하면서 몇 번 만났던 게 떠올랐다.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그때 요즘 만나는 여자 없냐, 누구 만나면 꼭 말해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 같다. 2017년에서 2018년을 걸쳐 쌓여온 이 메시지들은 한 달 전, 내가 배신감과 분노에 차 눈물을 펑펑 흘리며 구남친에게 보낸 문자와 같은 말. 단지 그 말들을 다른 표현으로 바꾼 것뿐이었다. 이런 게 바로 업보인가? 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업보를 몇 개나 만났을까? 나의 구남친도 4년쯤 뒤에나 그 문자를 발견할지 모른다.
돌고 도는 건 업보만이 아니다. 새로운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구남친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었다. 걔랑 난 너무 닮았고, 또 너무 오랜 시간 같이 붙어있었으니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서있는 게 잘 상상이 안 됐다. 그래도 어떤 연애를 할지는 눈에 선했다. 야외 데이트 땐 추울까 봐 담요를 챙겨 오고, 비싼 전자기기를 사주고, 도시락을 싸다 회사까지 배달해주고, 집 앞 초밥집에서 연어초밥을 포장해오겠지. 내 예상은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상상이 아니라 경험이었으니까. 연애도 돈다는 걸 그 두 사람이 말해주고 있었다. 가끔은 정답을 알고 싶지 않은 문제도 있는 법인데, 자꾸 나에게 흔적을 남기는 연인 때문에 결국 답지를 찾으러 가고 말았다. 내가 딱 하나 틀렸던 건, 내 옆자리가 아니어도 걔가 그 자리에 어울릴 수 있다는 것.
돌고 도는 건 연애만이 아니다. 구남친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의 구여친에게 연락이 왔었다는 걸 알았다. 그 연락을 단호하게 끊어냈다는 것까지 알아서,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냥 그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다. 헤어진 걸 왜 못 받아들이지? 구남친과 헤어지고 한 번 더 만났을 때 이 얘길 했었다. 너랑 헤어지면 날 저렇게 끊어내겠구나, 했었다고. 걘 웃으며 말했었다. 걘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지도 않았어. 연애가 도니 이별도 돈다. 그땐 그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젠 그 사람도 내가 미웠겠구나 싶다. 내가 미워해야 하는 건 구남친뿐인데, 애꿎은 타인을 미워하게 만든 게 걔가 한 가장 큰 잘못일 거다. 구여친과 나 사이에는 3개월 정도의 기간이 있었다. 나와 현여친 사이엔 2주는 있었을까? 짧아진 기간만큼 나에게 더 미안해 헤어짐에 조금 더 신경 써준 걸지도 모른다.
업보와 연애, 그리고 이별은 돌고 돈다. 다만 반복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연애일 뿐이다. 나에게 이별을 통보하기 2주 전인가, 구남친은 나를 집에 데려다 주곤 온 동네를 뒤져가며 내가 당시 꽂혀있던 과자를 한 아름 구해다 주고 돌아갔다. 파는 곳이 많이 없어서 근처 편의점엔 모두 들렀으며, 마셔보고 싶다고 했던 죠리퐁 막걸리는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못 사 왔다고 했다. 난 그게 사랑인 줄로만 알아서 헤어짐의 순간에도 이날을 떠올렸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잘해줬어? 걘 잘해준 게 아니라고 했다. 그냥 최선을 다한 거라고.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계속 미련을 뒀다. 이제는 구남친이 최선을 다한 건 연애였으며, 사랑은 아니었다는 걸 알만큼 시간이 지났다.
무엇이든 다시 할 땐 이전보다 잘할 수밖에 없다. 구남친은 나와의 연애를 인사이트 삼아 조금 더 나아진 연애를 하고 있겠지. 구남친과 헤어지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내가 이전에 만나본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거였다. 걜 만나기 전 한 번이라도 더 연애와 이별을 경험했다면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나의 다음 연애가 기대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4년 간 충실히 쌓아 올린 연애 경험이 다음 남자친구와의 연애에 최선을 다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남친이 새로운 사람과 나와의 연애를 반복하는 게 싫지만은 않다. 어쨌든 나와의 경험이 좋았다는 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