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으로서의 3.11>, 츠루미 슌스케 외
인간은 기본적으로 ‘통제’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다. 어떤 상황이 통제 가능할 때, 즉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때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소재로 한 영화 <판도라>를 보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도 아마 이것 때문일 것이다.
원전 사고가 터진 후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한정적이다. 특히 원전 주변 지역의 주민일수록 더 그렇다. 그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사고 현장에서 다만 몇 km라도 벗어나서 즉사를 피하기 위해 도로 위를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이미 위험수위 이상으로 피폭된 상태로 ‘의미 있는 죽음’을 맞기 위해 냉각로 가동을 시도하러 원전 내부로 들어가는 원전 직원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방사능은 시커먼 연기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위협적인 외양 자체가 없다. 그러나 인간을 즉각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 눈에 보이지 않는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종말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벌어진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 앞에서 인간은 무력했다. 인간은 끊임없는 기술 혁신으로 자연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심과 공포에서 벗어나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을 통제한 적이 없다. 인간이 ‘통제’한다고 착각하는 대상은 자연이 아닌 ‘세계’이다.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다. 그리고 끝없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그 세계를 점점 넓혀왔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던 많은 부분들을 세계의 범주에 포섭해왔다. 원전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이 핵분열 반응으로 에너지를 끊임없이 방출하는 원리를 발전 과정에 도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입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수차례의 대형사고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한번의 사고로 최소 몇만 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나오지만 이 수치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당장 증상이 없어도 후에 나타날 수도 있고, 다음 세대에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년에 한번 꼴로 큰 사고가 발생하고 있고 원자력 발전을 당장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불거짐에도 불구하고 원전 문을 닫지 못하는 것은 원자력을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 자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 원자력 발전을 포기하는 것은 현 세태를 무시한 비현실적인 처사이며, 비문명으로의 회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원전은 과연 문명인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의 인류는 원전을 포기하지 않은 지금의 우리를 원망하고 비판하고 ‘비문명’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또는 그렇게 여길 인류가 탄생하기조차 전에 인류의 종말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원자력을 대체할 에너지는 아직 찾지 못한 것뿐이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을 중단해야 한다는 절실함만큼의 노력을 지금 대체 에너지 개발에 투자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조나단 W. 와이트는 본인의 저서인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서 ‘지식은 힘이고 권력’이며, ‘균형을 잃은 일방적인 지식은 소비자와 노동자에게 똑같이 엄청난 불의를 일으킬 수 있고, 또 사회 전채적으로 엄청난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지식, 정보의 불평등은 과거에 비해 크게 해소되었다. 『사상으로서의 3•11』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것처럼, 원전에 대한 정보는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 사고의 책임 당사자들은 왜 피해 규모를 끊임없이 은폐하고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사고의 수습을 장담하는 것인가? 왜 우리는 일본의 원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서도 일본으로 여행을 가고, 일본 제품을 사용하고,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식품을 산지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먹고 있는 것인가? 원전뿐만 아니라 GMO를 비롯한 식량 문제, 미세먼지로 대표되는 환경오염 문제 등으로 인한 종말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세계’를 옥죄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도 필연적인 종말은 ‘죽음’이다. 아무도 생전 혹은 사후의 일을 알지 못하지만 죽음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종말, 개인적인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예정되어 있는 우리 스스로의 죽음이라는 종말에 갇혀 그 이상의 사유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 세대의 ‘삶에 대한 권리’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확장하고자 통제 불가능한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세계에 포함시키는 많은 시도들을 통해 종말을 끊임없이 앞당겼고, 급기야 죽음 이전의 종말을 상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핵폐기물인 우라늄-238의 반감기는 40억 년이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단위는 ‘담보대출’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조차 아닌 것을 담보로 하여 ‘현재의 생활’을 대출받고 있다. 언제 차압 딱지가 붙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