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어로 철학 풀이하기] - 형이상학
1. <형이상학>은 <편견학>이다.
[1]
세상에 편견 없는 사람은 없다.
서양철학이 태동한 시기, 고대 그리스에서는 세계를 설명해주는 궁극적 원리, 또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재료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했다.
'탈레스'라는 (아마도 최초의) 철학자는 만물이 곧 물[水]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곧 탈레스라는 사람의 편견이었다.
즉, 탈레스는 세상을 끝까지 분해하고 나면 물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탈레스는 세상이 물이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나름대로 체계적인 설명을 갖다 붙였다.
이렇게 하나의 편견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나는 '편견학'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에서, 나아가 지금까지도 포함해서 그 동안 실존했던 인물들 중 대(大) 철학자 중의 한 명으로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와 같은 선배 철학자들의 철학 작업을 정리하여 다음처럼 이름을 붙였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형이상학: 라틴어 metaphysica의 역어로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탐구하는 학문.) (출처 - 두산백과.)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편견학에 있어 예외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가지 근사한 편견이 많았던 사람이다.
가령 자기 바로 앞의 다른 개미를 쿡쿡 찔러 앞으로 행진하도록 하는 개미들을 뒷순서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자기 앞에 있는 다른 모든 개미들을 행진하도록 하는 주범(원인)이지만, 정작 바로 앞 개미를 쿡쿡 찌르기만 할 뿐, 자기는 우두커니 멈춰 있는 맨 뒤의 게으른 개미가 나올 수밖에 없다.
맨 뒤의 게으른 개미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 어려운 한자어를 풀어내자면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 앞으로 이어지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최초의 존재'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생각 정도면 충분히 '철학'이지(또는 그 근사한 이름답게 '형이상학'이지), 어째서 편견이라고 딱 잘라 말하느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견의 네이버 국어사전 뜻이 간단하게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라는 출처를 접하고 나면, 딱히 편견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동의 원동자라는 아이디어를 반박할 관념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반박이 가능한 그만의 생각일 뿐, 절대로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말뜻이다. 결국 부동의 원동자도 하나의 편견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렇다면 형이상학(편견학)은 무의미한 학문이 아닐까? 모든 형이상학적 아이디어가 일종의 편견이라면, 형이상학이란 걸 굳이 내세울 거창한 학문적 필요성, 학문적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형이상학적 아이디어가 '공정하게' 편견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편견학은 무의미한 학문이 아니게 된다. 곧 잇따르는 두번째 챕터에서 나의 편견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편견학은 유의미하다는 점을 보이도록 하겠다.
[2]
내가 구찌를 좋아해도, 구찌가 별로로 보이는 사람은 다른 브랜드를 고를 것이다.
그러나 구찌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그 자체로 무시할 수는 없다. 나는 구찌가 갖는 장점들을 이유로 들어 구찌의 값어치를 설파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쓸모를 갖춘 것은 최소한 한 명의 사람에게는 좋게 보인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다른 것보다 선호한다는 것 역시 편견의 일종이다. 따라서 구찌를 동종의 타 브랜드보다 상대적으로 더 좋게 본 나 같은 사람들은 구찌에 대해 긍정적인 편견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편견의 배후에서는 구찌가 가진 여러 쓸모가 나의 편견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 중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외면당하는 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작품이 설령 있다면,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우주에 사는 또 다른 인류나 외계인들에게도 보여주어야 공평한 평가가 될 것이다. 이렇듯 예술적인 선호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게 두면, 편견 간에는 절대적 우열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자기가 선호하는 가치를(구찌를) 다른 사람에게 설득(권유/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면서도 편견이 어떤 식으로든 쓸모를 배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쓸모가 없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권유하든 자랑하든 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편견학을 형이상학의 다른 이름으로 인정해도 형이상학=편견학은 여전히 유의미한 '학문'이라는 나의 주장이 근거를 얻게 된다.
오히려 모든 형이상학이 편견학으로 규정됨으로써 우리는 편견을 편견 '따위'로 격하시키지 않고 오히려 종류 불문, 똑똑한 누군가가 공을 들여 체계화한 편견학에서 설득력을 느껴 그 내용 속 편견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적인 공을 들인 편견은 공 들인 만큼 쓸모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하게 모두가 진리가 아니라 편견만을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형이상학의 실용적인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 형이상학은 누구들의 말처럼 철학적 독단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편견학이라는 새로운 인식표는 형이상학의 이용 가치를 명백하게 증언해준다.
편견이란 사람 한 명, 한 명의 브랜드와도 같다. 편견학이란 자신의 편견에서 예술적/미적 가치를 느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편견에 지식과 지성을 덧붙인 결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학은 이치를 꿰뚫어 보는 통찰을 제공하고, 생각을 풍부하게 가꿔주며, 보다 넓고 깊은 지적 대화를 위한 호수와도 같은 원천에 우리가 뛰어들게끔 만든다.
편견학은 편견의 종류와 편견에 찬 사람의 인구 만큼 다양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형이상학은 우리를 지적인 독단에 중독되게 만드는, 나쁜 철학적 요식행위와는 전혀 다르다.
현대철학의 경향을 반-형이상학적으로 이끈 근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형이상학을 지적인 독단으로 규정했지만, 사실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에 내 편견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독단이라고 하기에도 어렵다.
진정 독단이라면 나의 생각이 타인을 지배해야 말이 될 텐데, 타인이란 종족은 내 '독단적 생각'을 듣고서 나에게 맹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만의 독단을 방패 삼아 내 말을 선택적으로 듣기 마련이고, 만약 긍정적인 영향이 있다면 나에게서 지적인 통찰, 영감을 훔치거나 평소의 생각이 정리되고 이전보다 수준 높은 대화를 추구하게 될 뿐이다. 그렇게 보는 게 훨씬 상식적으로 자연스럽다.
(많은 경우, 웬만큼 유명한 철학자들은 자신의 생각 체계가 고차원적인 만큼 세계나 인간을 불필요한 정도로까지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오히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형이상학, 즉 심혈을 기울인 편견을 열심히 주장할수록, 인류의 지성은 발전에 가속도가 붙는다. 편견은 그것을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정당화할수록 해롭기보다는 점점 더 이로워진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당연히도 최선에 기여한다. 똑같은 논리다.
애당초 편견 없는 세상은 공상일 뿐이다.
[3]
<형이상학>은 <편견학>이다. 그리고 편견은 수다를 떨수록, 그리고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기 위해 지성의 전력을 다할수록 오히려 영혼의 영양분이 가득 차서 아예 물이 넘치기까지 하는 지혜의 샘이 된다. 멍청한 소리를 고집하던 사람도 어떻게든 자기 말이 맞다고 고집 부리기 위해 지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지혜를 읊는 시인이 된다.
인간을 고립된 존재자로 보는 오류를 이제 그만 멈추자. 편견은 소통됨으로써 지성의 양분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존재다.
비단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을 수정하고 퇴고하고 전진시키려면 기존의 편견과 새로운 편견 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한다. 결국 '편견이란 스스로의 자아 안에 갇히는 것'이라는 편견이야말로 상호작용의 개념을 빠트린 채 우리를 정신의 무인도에 고립시키는, 그야말로 독극물 같이 유해한 '왕 편견'인 것이다.
이렇게 여러 근거를 들어, 나는 편견에 가득 찬 인간의 불완전한 지성이야말로 인간 능력 중 가장 완전한 능력이라는 '편견'을 최선을 다하여 설명해보았다. 때문에 이 글은 나만의 편견학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