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식론>은 <까칠한, 편견 공포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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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식론자가 이렇게 묻는다.
"내가 구찌를 좋아해도 될까?"
인식론이란, 내가 구찌를 좋아해도 '되는지'를 의심하고 따지는 철학이다.
쉽게 말해, 인식론에게 허락을 맡아야만 구찌를 좋아하는 일이 '정당화'된다는 철학이다.
본격적인 글쓰기에 앞서 이전 글 <형이상학> 편을 요약해보자.
형이상학은 편견의 일종인데, 다만 체계적이고 공을 들인 편견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편견학'이라고도 불렀다. 편견은 흔히 '독단'이라든가 '고집불통' 같은 키워드와 연결되기 쉽다. 그러나 편견학=형이상학이 유의미한 철학인 까닭은,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알고 보면 우리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부대끼고, 또는 자기 안에서 기존의 편견이 새로운 편견과 부딪치며 결국 '편견'은 수정 가능성에 열려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상의 요약에서 핵심 키워드는 '상호작용'이다. 인간은 서로 그리고 자기 내면에서 끊임없이 주고받고 하면서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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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데카르트는 다음처럼 말했다.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 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즉, 나는 생각(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식론이란 단적으로 말해 데카르트를 따라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처럼 인식론자들은 어떤 것의 확실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의심과 같은 '까칠함'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구찌를 좋아한다고 해보자. 선호(preference)란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편견의 일종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내가 구찌를 선호하는 것도 '작은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구찌의 장점을 이래저래 떠들며 어떻게든 상대방이 구찌를 사도록 권유하고 있다면 말이다.
인식론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찌를 권유하기에 앞서 구찌를 좋아하는 일이 정말로 정당하게 이뤄질 수 있는 일인지를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들을 인식론에서는 '지식의 조건'이라고 부른다.
얼핏 보기에 내가 구찌를 다짜고짜 권유하는 것은 썩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먼저 구찌를 들이밀어도 되는지 몇 가지 심사를 거쳐야 하지 않을까?
이때 주의할 것은 구찌가 가진 여러 장점들이 정당화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상대방이 구찌를 좋아하려면, 내가 구찌를 좋아하는 일이 먼저 정당화되어야 한다. 즉, 구찌를 '좋아한다'는 태도가 인식론적으로 바람직한 태도일 때 비로소 상대방도 구찌를 좋아해도 된다. 이제 나는 구찌 영업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은 이렇듯 '정당한 시작'의 조건을 제시하려고 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를 필두로 한 '고전적 인식론'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깔려 있다. 바로 인간의 기본적 성격을 고립적 존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도 논증했듯이 인간은 현실적으로 고립된 존재일 수가 없다. '상호작용'을 기억하자.
인간이 고립된 존재라는 가정 하에서는 편견 만큼 해로운 것이 없다. 이러한 고립주의의 논리에 따르자면, 인간의 마음과 지성은 닫혀 있고, 자기만의 편견이 한번 형성된 이상 인간은 영원히 독단주의자로 남을 테니까.
고전적인 전통 인식론에 따르면,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던 '편견학'은 당대에 충분히 지식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어서 버려야 할 '나쁜 철학', '형이상학적 독단'으로 추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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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인식론을 가리켜 <까칠한, 편견 공포증>이라고 부른 것이다. 어떻게든 지식의 조건을 갖춘 지식만을 정당한 지식으로 추앙하려는 까탈스러운 사고방식.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탈레스의 '물의 형이상학'은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아이템'일 뿐이다. 생전의 동시대인들에게는 물론이고, 탈레스의 생각을 꼼꼼히 공부한 현재의 철학자들에게도 탈레스의 '편견'은 영혼의 시야가 좀 더 트이도록 해준다. 탈레스 철학을 이해하고 있으면 동시에 세계를 이해하는 지평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편견 공포증이 전제하는 비현실적 가정을 걷어내고 나면, 실제의 인간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에, 탈레스 역시 세계를 이해하는 가능성을 확장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는 탈레스를 이해하는 만큼 세계를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템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마치 코딩을 할 때 '프레게'라는 철학자의 언어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고 있으면 코딩을 실제로 더욱 잘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프레게는 컴퓨터의 언어 및 논리에 대한 기초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고전 인식론이 아니라 '현대 인식론'은 얼핏 경우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현대 인식론에서는 사회적 실천, 즉 (사회적) 상호작용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인간을 상호작용하는 존재로 보는 인식론적 입장이라면, 우리는 누군가가 구찌를 좋아해도 '되는지'를 겸손하게 따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 인식론을 지식의 심사위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나의 대답은 고전 인식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No'이다. 현대 인식론은 지식의 조건을 '외로운 주체'가 아니라 '공동체'가 규정한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상호작용을 한다는 전제 자체로 이미 구찌를 선호하는 나의 편견은 수정 가능한 범주에 놓여 있다. 즉, 나는 편견을 조금 변경하거나, 아예 다른 브랜드로 갈아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정이 이런데, 굳이 구찌를 좋아해도 '되는지'를 따져서 뭘 얻겠다는 것인가?
(현대 인식론은 여전히 <편견>을 '스스로의 자아 안에 갇히는 것'으로만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편견의 실상은 오히려 정반대다.)
물론 현대 인식론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질문이 '편견을 올바른 생각으로 인정해도 될까? 그런 생각을 가져도 되는지 심사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 속에서 맴돌 뿐인 한, 인식론은 그저 공허한 지적 놀음에 불과하다. 인간의 정신은 이미 개방되어 있는데 무엇을 위해 의심하고, 무엇을 위해 심사에 넘기기까지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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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대에 오면 인식론이 적용되는 범위가 넓어져서, 특히 과학 이론을 검증하는 용도로는 인식론이 중요한 아이템이 되기도 한다.
(인식론을 이해하는 만큼 과학적 세계를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 이론은 과학적 객관성을 전제로 하는 규칙들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만 과학적 지식을 구성한다. 반면 철학 또는 형이상학은 별다른 규칙이 없고 단지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와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 편견을 적는 일, 즉 '세계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과학과 철학이라는 두 종류의 지식 체계가 서로 이질적인 만큼, 우리는 여전히 인식론이 형이상학=편견학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편견 공포증을 조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편견이란 그 자체로 열린 편견이다. 그것이 현실 인간의 기본조건이다. 때문에 나는 철학적 전통으로서의 인식론에 대해, 고전적 인식론이건 현대 인식론이건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인식론을 부정, 거부하는 입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