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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군 Jul 10. 2022

[일상어로 철학 풀이하기] - 논리학

3. <논리학>은 <보석 세공업자가 보석의 가치를 감정하려는 오류>이다.

[1]

  "철학에 디테일을 더하다."


  윗 문장은 논리학이라는 브랜드의 캐치프레이즈이다.


  논리학이란 이처럼 우리들의 생각 속 디테일을 건드리는 일이다. 논리학이 없다면 우리들의 생각은 큰 안목만 가질 뿐, 대체로 부정확하거나 너무 앞서나가는 등 빈틈이 군데군데 생길 수밖에 없다.


  논리학의 이러한 기능을 나는 '생각을 세공하기'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생각의 디테일한 부분을 정밀하게 작업하여 생각을 보다 정확하고 침착하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논리학 없이는 생각의 약점을 발견하고 고치기가 어렵다.


  하지만 현대철학의 큰 흐름은 논리학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새로운 문제를 낳고 말았다.


  쉽게 말하자면, 생각의 디테일을 수선하던 기술자가 갑자기 생각의 가치를, 쓸모를 멋대로 감정하려 든다는 것이다. 마치 옷을 감정하고 평가하는 패션 전문가가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옷 수선 기술자가 패션의 전문가는 아니다.  




[2]

  본래 논리학은 (서양철학 기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학문이다. 당시 논리학이 고안된 이유는 철학 이론들이 부정확하거나 생각의 비약이 심한 부분이 없는지를 탐색하고 고치기 위해서였다.


  가령, 누군가가 '철수는 여자이다'라는 주장을 했을 때 철수가 사실은 남자인데 그런 주장이 나왔다면 그 주장을 명백한 '거짓'이라고 판정할 필요가 있다. 그때 참/거짓의 기준과 조건을 제공해주는 게 바로 논리학인 것이다.


  즉, 논리학이란 생각을 정정해주거나 처음부터 정확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인 것이다.


  진짜 문제는 19세기가 되면서 나타난다.


  독일에 '프레게'라는 수학자이자 논리학자가 등장한 것이다.


  프레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뒤엎고 혁신적인 새 논리학을 발표했다. 새 논리학은 너무나도 강력한 나머지, 단순히 문장의 참과 거짓을 밝히는 역할을 넘어서 '의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생각이 의미 있는가? 그때 그 생각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이제 새 논리학이 결정해준다.


  새 논리학은 이전 세대의 논리학과는 다르게 단순히 누군가의 '생각'에 개입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들의 생각이 기초를 두는 '생각의 근본적 재료들'에까지 접근하는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은 '쓸데없는' 생각을 담고 있다고 점수가 매겨진다.


  "철수의 책상은 책상의 '이데아'(*원형이 되는 이상적 존재)로부터 책상의 성질을 나눠 받음으로써 존재한다."


  새 논리학에 따르면 책상의 이데아 같은 것은 실제 사물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 사물들의 세계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만이 새 논리학의 논리 기호로 표현이 가능하다.


  이때 실제 사물들의 세계에 있거나 없는지 그 여부는 새 논리학이 점유하는 '생각의 근본적 재료들'에 달려 있다.


  즉, 이제는 논리학만으로 생각을 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좀 더 말해보자면, 논리학이라는 수선 도구로 옷을 새로 짓고, 그 옷을 유행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옷을 그냥 유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선 도구만으로 다른 옷을 재단하고는 '불합격' 판정을 내리고, 새 논리학으로 지은 옷들만이 합격점을 받게 해, 논리학적 패션이 아니면 애초에 유행 자체를 일으키는 일이 불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새 논리학이 갖고 있는 '근본적 재료들'만이 세계의 객관적인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3]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생각의 근본적 재료들'은 정작 우리가 따져볼 수 있는 모든 생각에 동등하게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 '새 논리학의 독단'이라고 부른다.




[3]

  그런데 이전 두 편의 글에서 내가 말했듯, 모든 생각은 '열린 편견'의 산물이고, 우리는 한 가지 생각을 갖고서 세계를 통찰하거나 하던 일을 좀 더 잘 수행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식론을 등에 업고 생각을 함부로 제한하는 것은 편견을 좁게 정의해서 생긴 일이므로 근거 박약하며, 오히려 인식론이야말로 독단을 저지르는 진짜 범인이라는 얘기까지 했다.


  하지만 새 논리학은 본래 자신의 역할('생각의 수선')을 뛰어넘어, 새 논리학을 통해서 하는 특정한 생각이 아니면 논리학이 추종하는 '생각의 근본적 재료들'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많은 생각들을 폐기하고 있는 것이 실제 지금의 현실이다.


  생각의 근본적 재료들은 그것들 역시 일정한 편견에서 비롯된 '어떤 편견학'의 요소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실제로 생각 전체에 대해서는 전혀 근본적이지 않으며, 단지 그 재료들로 구성한 생각에 있어 한정적으로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근본=뿌리는 그것이 뿌리 내리고 있는 나무에게나 근본적인 셈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보석 세공업자가 당연스레 보석 감정사를 자처하게 되었는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떤 보석이 산지에서 화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유로 보석만이 '가치(의미) 있는' 보석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현재 철학계의 현실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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