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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블리 Jun 16. 2021

어쩌다 엄마가 되었다.

환영받지 못한 선물

딱 10년 전, 27살에 '어쩌다' 엄마가 되었다.


27살까지 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달 벌어 한 달 쓰는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도 없었거니와 결혼하고 싶을 정도의 간절함, 사랑? 그런것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냥 구속받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대충 사는 것이 편했다.


그러던 내가,

'별생각 없이 사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된단다.


눈 앞이 캄캄했다. 마음의 준비는 커녕 통장에 잔고도 없었고 설상가상 생이 결혼한 지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 혼자 우리 자매를 키우고, 동생을 시집보내면서 꽤나 마음고생했던 것을 옆에서 봤기에 감히 상상하기도 미안한 일이었다.


눈치도 없이 테스트기에 두 줄은 너무나 선명했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신촌에 있는 산부인과에 갔다. 혼자는 두려워서 동생에게만 털어놓고 같이 갔다. 대기시간이 어찌나 길던지 심장이 쿵쾅대서 가만히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임신입니다. 5주 정도 되었네요. 결혼하셨나요?"

"아니요."

"초음파 사진 드릴까요?"

"네? 네...."

초음파 비용을 지불하는 카운터에서 간호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도 안 마주치고 말했다.

"사진 받으셨어요? 사진 가지고 가시면 저희 병원에서 수술 안됩니다."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았다고 대답하고 사진을 들고 나왔다. '수술'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 반항심? 같은 게 생기더라. 하려고 했는데 누가 하라고 시키면 하기 싫은 것 같은 심리였을까?


'참나, 다짜고짜 수술??? 누가 한대????'

그때 그 병원에서 그 말을 안 했더라면 지금의 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나와 동생과 한참을 말없이 고개 숙이고 있었다. 동생이 눈치를 보다 질문을 하나씩 던지는데 모든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냥 머릿속이 하얘지고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다 모른다고 회피해버렸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남자 친구를 만난 지 반년도 안됐을 때의 일이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피식 나오기도 하고 몇 초만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보면 테스트기에 두 줄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축하해주던데 나에게 찾아온 임신은 그렇지 못했다.


설상가상 남자 친구와는 헤어질 준비를 하고 냉전 중이었으니 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며칠을 멍한 상태로 지내다가 혼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일조차 억울하게 느껴져 당장 만나자고 했다.


한강이었던가 개천이었던가 어떤 다리 밑에서였다.

"오빠 돈 얼마 있어요?"

내가 임신 사실을 고백하며 처음으로 그에게 꺼낸 말이었다.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왜 그러냐고 묻길래 덤덤하게 임신했다고 말해놓고 금방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는데 엉엉 울어버렸다. 낳으면 되지 왜 울기만 하냐길래 책임질 만큼의 돈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걱정 말라고 어떻게든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어떻게든'이라는 말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내심 원했던 답을 얻은 것 마냥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동생과의 긴 상의 끝에 어렵게 엄마한테 임신 사실을 알렸는데 단호하게 안된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적잖이 당황했다. 애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된다고 당장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무조건 허락해달라고 선언한 것도 아니었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꺼낸 말이었는데 무조건 안된다고 당장 지우라고 하니까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방에 들어가 크리넥스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계속 울기만 했다. 한참을 울다가 내가 왜 우는거지? 하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마치 소리내어 우는 것만이 가장 솔직한 일이었던 것 처럼.


나는 어렵게 엄마한테 선언하고 시위를 하고 있는데 그는 아직 집에 알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런 남자를 믿고 따라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더 힘든 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 사실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나한테 말했던 것보다 많이 편찮으신 상태였고 중환자실 입퇴원을 반복하며 가족 모두가 힘들어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허락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것을 양가에 하고 나서 결혼식을 서두르기로 했다. 금전적 여유가 없다 보니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배가 금방 불러올 테니 시간도 얼마 없었다.


거의 밤이 새도록 예신들의 성지인 '레테'를 들락거리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웨딩플래너니 꾸밈 비니 예단이니 결혼이라는 것에 들어가는 돈이 왜 이렇게도 많은지! 동남아 신혼여행 조차도 나한테 사치여서 였을까? 그곳에서의 나는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나 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떻게든 전셋집을 마련하면 된다고 걱정 말라던 그는 탈탈 털어서 딱 2천만 원이 있었다고 한다. 몇 해가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우리 참 용감했다 싶더라.





우리는 2월에 만나 3월에 연애를 시작하고 9월에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올해로 딱 10년이 되었다.


결혼이라는 것.

두 눈에 스파크가 튀고 마주치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그런 사람이랑 해야 되는 줄만 알았다.

어쩌다 만난 사람과 어쩌다 아기가 생겨 이렇게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든 후다닥 해버릴지 상상도 못 했다.


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결심하고 어떤 식장에서 어떤 드레스를 입고 어떤 촬영을 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는 것보다 현명하게 결혼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 딸이, 내 아들이 20년 후에 우리와 같은 결정을 한다면 과연 흔쾌히 허락해줄 수 있을까? 엄마가 되고 나니 우리 엄마가 그때 했던 결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감히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결정보다는 포기에 가까웠지만)



그때의 나로 돌아가 같은 선택을 하겠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yes' 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거냐고 묻는다고 해도 나는 'yes' 다.


10년 전의 내가 내 아이를, 이 남자를 선택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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