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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블리 Jun 23. 2021

이 결혼 왜 하는 거예요?

가진 것은 없고 바라는 것은 많다.


ep1. 신혼집 구하기


결혼식장을 계약하고 식장에 맞춰 날짜를 잡고 나니 신혼집을 구해야 했다. 바쁜 예비 신랑을 대신해 혼자서 부지런히 집을 보러 다녔다. 가진 돈은 적고 따지는 것이 많았기에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임신 초기인 데다 날이 더워 대중교통으로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서울에서 5~6천 짜리 전셋집을 구하러 다녔으니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친정집은  몇 년 전에 입주한 새 아파트였으니 내 나이만큼 먹은 다세대 주택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부동산 아주머니를 따라 꼬불꼬불 한사람 지나가면 꽉 차는 좁은 골목길을 한참 하고서야 나오는 집을 보여주기도 했고 일자로 길게 이어진 (현관-방-주방-방-화장실 현관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모든 공간을 지나쳐야한다.) 독특한 구조의 집도 있었다.  살고 계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어리광 조금 보태면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 싶은 집만 골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가까운 지하철 역은 어디에 있어요?"

"1층은 조금 무서운데, 2층은 없나요?"


보여주는 집 마다 내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하니 부동산 아주머니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참는다는 듯이 말을 아꼈다.


서너 군데 집을 보고 마지막으로 다세대 주택 2층에 있는 을 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2층 좋다고 했죠? 이 가격에 이 정도면 진짜 괜찮은거예요"

말 끝마다 '이 가격'을 강조하던 아주머니의 말에 가시가 있는 듯 했다.


"집은 괜찮은 것 같은데 지하철역에서도 너무 멀고 시장이라도 가려면 한참 내려가야겠네요."  

내가 말했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부동산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가씨, 어디 살아요?"

"저 상암동이요."

"아파트 살아요?"

"네."

"상암동 아파트 살다가 이런 데 집 보면 당연히 마음에 안 들죠. 그런데 이 결혼은 왜 하려고 하는 거예요?"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뒤통수를 세게 빡! 맞은 기분이었다. 그 말 끝에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라며 결혼에 대한 조언을 몇 마디 더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마짜리 집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지하철역 타령이나 하고 있는 철없는 여자를 향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나와버렸던건 아닐까 싶다.


그날 결국 마음에 드는 집을 찾지 못했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내가 이 결혼을 왜 하려고 하는 걸까?'


이미 생긴 아기 때문에 쫓기듯 서두르고 있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사는 데 있어서 돈이 중요한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결혼이라는 하려다 보니 새삼 '돈'의 중요함도 알았다. 


'원하는 것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한 돈' 앞에서 한없이 위축되고 있었다.


미친듯이 사랑해서 '그와 함께라면 거적대기 하나라도 좋아!' 따위의 생각이 없었기에 이 현실이 더 매섭기만했다.






하루는 결혼식이 있어 대구에 내려갔던 날이었는데 정말 괜찮은 집이 나왔으니 최대한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연히 남편 될 양반은 바빠서 같이 못 가는 상황이었고 누가 채갈까 식이 끝나기 무섭게 부랴부랴 기차를 타고 지하철,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일단 버스정류장이 가까웠고 길 건너 슈퍼도 보이고 사거리 건너엔 더 큰 마트가 보인다. 게다가 오르막이 아닌 평에 있는 다세대 주택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202호의 문을 열었는데!

널찍한 주방도 있고 거실 겸 방으로 사용할 만한 큰 방이 정면에 있었다. 네모 반듯한 집에 방 3개, 이 가격에 이런 집 못 구한다고 정말 운이 좋은 거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남편에게 사진을 몇 장 찍어 보냈더니 얼마냐고 묻는다. 주변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매물이라면서 무조건 이 집으로 하자고 밀어붙인다. 물론 나도 지금까지 봤던 집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지체 없이 결정하기로 했다.


결혼할 상대를 만나면 느낌이 온다던데 그건 잘 모르겠고 계약할 집을 만나니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환하게 느껴졌다. 양해를 구하고 몇 장 찍어온 집의 구조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가구 배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ep2. 신혼집 인테리어


아주 나이스 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운 좋게 가격 대비 훌륭한 집을 구했고 슬슬 정을 붙여보기로 했다. 무지개떡 벽지가 붙기 전까지는 말이다.


입주 전에 도배와 장판은 해야겠다고 했더니 아버님이 직접 사람들을 불러 도배를 해주시겠다고 했다. 포인트 벽지를 붙여주신다길래 없어도 될 것 같다고 그냥 무난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까지는 몰랐지 포인트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혼집을 계약하고 나니 어떤 가구를 사서 어떻게 배치할지, 가전은 어디서 어떻게 사야 싸게 살 수 있는지 폭풍 검색하느라 바빴다. 이미 배송이 시작된 것 마냥 그 설렘이 즐거웠다. 물론 예비 신랑과 상의하며 팔짱 끼고 쇼핑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걸 골라서 보여줘도 괜찮다, 필요 없다는 말만 돌아왔으니 결국 기분만 상할 뿐이었다. (이건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


도배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들뜬 마음으로 도착했다. 현관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거실 겸 방에 떡하니 붙어있는 포. 인. 트. 벽. 지


알록달록 분홍색, 연두색, 하늘색 세로 줄무늬였다.


보자마자 무지개떡이 상상되는 그런...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너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더니 남편이 아버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지금 집에 왔어요."

"봤냐? 아부지가 포인트 벽지 기가 맥힌 걸로 골랐다."

"아 네. 봤어요. 예쁘네요~"


뭐라고? 예쁘다고???

팔짱 끼고 서서 씩씩대고 있는 나를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버지와의 통화를 대충 마무리 짓고 끊었다. 당장 뜯어버리고 싶다고 그래도 신혼집인데 이게 뭐냐고 왜 아버님 마음대로 붙이신거냐고 따져묻기 시작했는데 남편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신경 써서 해 주신 건데 바로 뜯는 건 너무 서운하실 것 같으니 그냥 마음에 드는 척해 줄 수는 없느냔다.


아니, 이 남자 보게. 이 집에 2년 동안 살아야 할 나보다 아버지의 서운할지도 모르는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안 먹히는 것 같아 이 벽지를 보고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고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볼수록 마음에 안 들어 정말 우울해질 지경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가구를 놓아도 어울리지 않을 것이고 이대로 신혼집 인테리어는 망한 거라고 말하다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결국 집들이 때까지만 떼지 않기로 약속하고 부모님이 한 번 왔다 가신 다음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더라. 한참이 지난 후에 물어봤지만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알 수 없었고 본인 눈에는 심지어 그 무지개 벽지가 예뻤다고 한다.


하늘하늘한 거실 커튼이나 우드 블라인드까지는 아니어도 알록달록한 무지개 벽지는 상상해본 적 없었는데 이것이 현실이구나 싶었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씩 맞춰가는 것, 시월드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솔직하게 내색하기 어려운 것, 그 것이 현실이었다.


몇 날 며칠을 벽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징징댔더니 얼마 후에 벽지 사이트 링크를 보내왔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디자인만 고르라며 형이 직접 와서 붙여주신다고 했단다. 도대체 뭐라고 말을 했길래 형이 우리 집 벽지를 붙여주는 거냐고 쏘아붙였다. 그냥 내 맘대로 하게 두면 안되냐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한 번 망치게 되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이 먼저였고 유별난 제수씨로 찍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두 번째였다. 유별난 제수씨고 뭐고 무엇이든 무지개 떡보다는 백 번, 천 번 나았기에 고심 끝에 카페거리가 그려진 포인트 벽지를 골랐고 주말에 아주버님이 깨끗하게 붙여놓고 가셨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 공간에 침범한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단순히 그 벽지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남편이라는 사람이 내 감정보다 아버지 감정을 먼저 헤아린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냥 그 신혼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복합이었을지도.


렇게 우리는 어렵사리 신혼집을 마련하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만큼 사는 것에 감사하자며 종종 '우이동 시절' 잊지 말자고 말한다. 우리에겐 즐겁고 행복한 기억보다 여러모로 어려웠던 시간이 더 컸던 시간과 공간이었기에 현재에 더 충실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또 10년이 지난 후에 지금을 추억하며 '그땐 그랬지' 하는 날이 곧 오겠지. 그때의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안정적인 모습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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